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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현왕후는 왜, 어떻게 폐위되었나?
。숙종의 후계자는 어떻게 결정되었나?
。숙빈 최씨와 숙종의 인연은 어떻게 맺어졌을까?
。영조, 어머니 숙빈최씨의 이름을 바꾸다?
。궁녀의 인생역전, 과연 만만한 일인가?
。궁녀 위의 궁녀, 감찰 상궁이 존재했을까?
。희빈 장씨의 출신은 무엇이었을까?
。장희빈, 당쟁의 주모자인가 희생양인가?
。동이[숙빈최씨]는 천민 출신이었을까?
。영조가 어머니를 위해 지은 비문


。장악원은 어떤 곳이었을까?
。악공은 어떻게 선발되었나?
。조선시대 악보는 어떤 모양이었을까?
。왕실 잔치의 공연복은 어떤 것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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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계, 그들은 누구인가?
。검계의 전신, 서울 향도계
。조선시대의 CSI, 오작인은 누구인가?
。조선시대 검시는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 동이[숙빈최씨]는 천민 출신이었을까? 조회수 : 277833 
 


깜찍하고 총명한 동이는 장차 영조의 어머니[숙빈최씨]가 되는 인물이다. 숙빈최씨의 아명 동이는 가명임이 분명하지만, 출신이 반궁촌 천민이라 한 것을 어찌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

반궁은 성균관의 별칭으로, 성균관을 반수(泮水)가 아래로 반쯤 둘러싸고 흐른 데서 나온 명칭이다. 반궁 주변에는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요즈음의 대학 주변 하숙촌과 같은 풍경이다. 이곳에는 과거에 응시하거나 관직을 구하려는 양반들이 장기간 머무는 하숙집을 비롯해서 푸줏간, 음식점, 주점 등이 성업했다.

그런데 「영조실록」에 따르면 숙빈최씨가 태어난 곳은 여경방 서학동이다. 반궁촌이 아니다. 서학동은 말 그대로 서부의 학교 서학이 있는 동네로서 여경방에 속한 곳이었다. 영조는 이 곳 생가에 숙빈의 아버지 최효원과 외조부 홍계남의 자손이 대대로 살면서 팔지 못하게 했으니 꽤나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숙빈최씨를 위해 별도의 사당 육상궁(毓祥宮)을 세우고 시호(諡號)를 올리는 등 추숭 작업을 마무리 한 뒤에 뒤늦게 생가 복원을 꾀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있다. 육상궁이 경복궁의 서북쪽인 북부 순화방에 있었으므로 가까운 거리에 생가를 두고자 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동여지도』「한성부」

숙빈최씨가 후궁이 되기 이전의 삶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동이의 신분을 천민으로 설정한 것에 수긍하게 되는 것은 숙빈최씨가 무수리 출신이었음이 기정 사실화되었기 때문이다. 금평위 박필성은 영조의 명으로 「숙빈최씨신도비명」을 찬술하면서 ‘행록’을 참고하여 숙빈최씨의 가계를 알았음을 밝히고 있다.

“행록을 살펴보면 최씨의 세계(世系)는 수양(首陽 : 해주) 출신이다. 증조는 말정(末貞)으로 품계가 통정이고, 조는 태일(泰逸)로 학생이며, 고는 효원(孝元)으로 행충무위부사과이고, 모친 홍씨는 통정 계남(繼南)의 딸이다. 현종 경술년(1670) 11월 초6일 기미생으로 병진년(1676)에 뽑혀 궁에 들어왔으니 겨우 7세였다”

숙빈최씨신도비

이 신도비는 숙빈최씨가 죽은 지 8년이 되는 해인 영조 1년(1725)에 세운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기록된 숙빈최씨 사조(四祖)의 직역으로는 원래 신분을 판별할 수 없다. 드라마 동이에서는 최효원의 직역이 검시관인 오작(仵作)으로 설정되어 있다. 오작은 시신을 검안하고 처리하는 일을 맡은 천민이었다. 그들의 출신이 천민이건 아니건 숙빈의 봉작에 따라 사조에 대한 추증도 동시에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숙빈의 지위에도 불구하고 최효원의 직역이 종6품 무반 체아직인 부사과에 그친 사실과 그의 가계기록이 해주최씨 족보에 수록되지 않은 것은 출신의 미천함을 반증하는 대목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다면 미천한 출신의 동이는 어떻게 궁녀가 될 수 있었던 것일까? 조선시대 궁녀는 대체로 중앙관청에 소속된 여자종에서 선발하였으므로, 민간의 천민이 궁녀로 뽑히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천민 출신 여부가 불분명한 숙빈최씨가 입궁한 시기는 숙종 2년(1676)이었다. 그 동기는 양친이 모두 일찍 죽는 바람에 생계가 막막했기 때문일 수 있으나 분명하지 않다. 입궁 후의 행적도 알 수 있는 자료가 없다. 그저 무수리로 지냈다는 구전이 거의 사실처럼 굳어진 분위기다. 무수리는 상궁과 나인의 하인으로서 물 긷는 일을 담당했다.

숙빈최씨는 인현왕후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 「수문록(隨聞錄)」을 보면, 폐출된 인현왕후의 탄신일에 성찬을 차려놓고 정성을 드리는 나인에게 감동한 숙종이 그를 가까이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나인이 곧 숙빈최씨이다. 이 자리에서 숙빈최씨는 자신이 중전마마의 시녀로서 지나치게 총애를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전남 담양에 있는 용흥사나 대각교에 얽힌 설화에서도 인현왕후와의 특별한 인연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중궁전의 시녀로서 나인이라고 하여 숙빈최씨의 출신성분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무수리를 나인이라 칭하기도 하고 또 일정한 기간이 지나 무수리에서 나인으로 승격되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인현왕후를 폐비시킨 것을 후회하고 있던 숙종이 무수리 최씨의 정성에 감동하는 계기를 만든 것은 최씨의 신분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조선정부의 공문서에 나타나는 각종의 기록이 출신의 근본에 대한 답을 주고 있질 못하고 그 외에 전하는 기록도 없으니, 숙빈최씨가 천민 출신인지 무수리 출신인지의 여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겨두어야 할 듯하다.

필자: 임민혁(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연구소 연구원)

 

■ 참고문헌
신명호, 「궁녀」, 시공사, 2004.
임민혁, 「조선후기 영조의 효제논리와 사친추숭」, 「조선시대사학보」 39, 조선시대사학회, 2006.
「숙빈최씨자료집」 4,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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