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어나면 죽는 것이 인간사의 이치. 그 주검으로 인해 생긴 단체가 향도계, 우리말로 상두계였다. 향도계는 양반이나 양인, 천민을 물론하고 상여를 나르고 무덤을 조성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서울이나 지방을 막론하고 전국적으로 조직되어 있었으며, 계원 대부분은 평민이나 천민 등 하층민이었다.
향도계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일정액의 회비, 즉 쌀(米)과 베(布)를 납부하고, 계의 조약에 동의하여야 했다. 초상이 났을 때 서로 돌보아 주고 기금을 통해 경제적으로 도와주는 것이 기본 목적이니, 조약 또한 그러한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우리의 전통적인 계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토속적 요소가 많은 것이 향도계이다. 여씨향약과 같은 중국의 향약이 보급되기 이전 삼국시대부터 있어온 우리 고유의 미풍양속이었다.
이러한 향도계가 사회적 문제로 크게 대두된 것은 17세기 중엽 이후 한성부, 즉 서울에서였다. 이 시기 한성부 향도꾼은 동내(洞內) 주민 중심에서 벗어나 이웃 동내, 더 나아가 한성부 전체를 지역적 기반으로 하는 대형 조직으로 변모하였다.
(그림) 상여 메고 가는 상두꾼의 모습
순수한 계원으로서 동네 주민도 있었지만 주인을 배반한 노비(叛主奴婢), 부모를 배반한 사람(背父者) 등 기존 사회 질서에 불만을 가진 하층민들이 대거 가입하였다. 뿐만 아니라 향도계 핵심 주도층은 중인(中人) 이하 집안의 종이나 하인들은 그 수가 많고 적음을 묻지 않고 계에 가입하도록 협박하였다. 주인이 이를 거부하면 차사(差使)를 파견해 해당 노비를 잡아와 강제적으로 가입시키기도 했다. 또한 계원들 다수가 그 집에 쳐들어가 쌍욕을 해대는가 하면 그 집 처녀를 보쌈해왔다. 이 같은 무리한 행위에도 불구하도 계원의 세력이 너무나 막강해 항의조차 못할 지경이었다. 그 숫자는 많은 경우 수 백 명에 달했고, 적은 계일지라도 100여명에 이르렀다.
향도계 최고 우두머리를 존위(尊位)라고 불렀다. 존위는 초상이 나지 않았을 때에는 계원들을 동원해 자기 집을 짓거나 담을 쌓는 일을 시켰다. 또 초상이 났을 때는 무료로 해주어야 할 운구(運柩) 행위에 대해 과도한 금전을 요구해 받아 챙겼다. 또 이들은 운구 거리를 40리로 제한하기도 하였고, 멀지 않은 곳까지 운구하는데도 7, 8일 혹은 10 여일을 끌어 상주들의 애간장을 태우기도 하였다. 운구가 끝나면 주인에게서 역가(役價)를 받아 향도꾼의 집합소인 도가(都家)에다 바쳤다. 이렇게 모은 기금은 이식을 통해 계를 운영하는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승정원일기』영조 12년(1736) 4월 17일)
향도꾼은 서울의 거리를 무리지어 횡행하였다. 양반들이 지나가면 눈을 옆으로 비스듬히 뜨고 꼬나보았다. 동내 사람들이 사납고 포악한 사람들을 보면 으레 향두꾼으로 여길 정도였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양반이나 조선 정부 입장에서 본 부정적 시각이었다.
향도계의 폐단을 제거하기 위해서 조선정부에서는 중국에서 들어온 향약을 범국가적으로 보급하고자 하였다. 16세기부터 보편화되는 향약 보급운동은 어디까지나 양반 중심의 사회질서 구현을 목표로 하는 것이었다. 한성부 향도계가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자 운구와 무덤조성 등을 향약을 통해 대체하고자 했다. 조선후기 향약의 목적 가운데 하나로 상장(喪葬)에 대한 상호 부조 조항이 추가된 데에는 이 같은 배경이 있었던 것이었다.
이와 같이 한성부 향도계가 사회적 불만 세력으로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요소를 꼽을 수 있다. 첫째, 그들은 상전 등 주위 양반들에게 경제적 이해관계에 있어 직접적으로 종속되어 있지 않았다. 상전이나 양반들의 논밭을 경작하는 노비, 또는 하층민이라면 감히 토지소유주의 이해에 반하는 행위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둘째, 익명성이 보장되고 회합이 용이한 도회지에서 활동했다는 점이다. 17세기 중엽 서울은 인구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도망 노비나 소작인들이 대거 옮겨 다녔기 때문에 특히 유동 인구가 많았다. 이 속에서 향도계원의 불법행위는 쉽게 드러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덕적 비난으로부터 일정부분 익명성을 보장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향도계 조직이 수 백 명에 달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보다 깊은 사회적 모순, 예컨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양반층의 분열과 대립 그리고 그들의 부도덕성, 한번 노비가 되면 영원히 그 신분을 벗어나지 못하는 노비세전법, 능력 위주 사회를 가로막는 서얼차대 등의 사회적 불평등 요소야말로 하층민이 사회의식에 눈을 뜨게 하는 촉매제였던 것이다. 한성부 향도꾼이 사회적 연대조직으로서 부각된 것도 이 같은 사회 경제적 모순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과 같은 정부측 기록에 수록된 향도계, 검계 관련 논의는 부정적 시각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러나 왕과 신하들 사이에 오고간 토론을 면밀히 살펴보면 불만으로 가득 찬 하층민들의 시선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조금 과장해 말한다면 한성부 향도꾼이야말로 사회모순을 고발하고 자기 권익을 위해 궐기한 우리나라 최초의 시민운동단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필자: 안승준(한국학중앙연구원 고전자료정보화연구실 실장)
■ 참고문헌
정석종, 『조선후기사회변동연구』, 일조각, 1983.
이수광, 『조선의 방외지사 - 시대에 맞서 삶을 뜨겁게 살았던 조선시대 비주류들의 이야기』, 나무처럼, 2008.
이수광, 『잡인열전 - 파격과 열정이 살아 숨 쉬는 조선의 뒷골목 히스토리』, 바우하우스,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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