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현왕후(仁顯王后, 1667-1701)는 숙종의 계비(繼妃)로 입궐하였으나 폐위되었다가 다시 복위되는 등 순탄치 않은 삶을 산 인물로 유명하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역사서에서는 그녀의 비극적인 삶 뒤에 희빈 장씨의 음모가 있었음을 기술하였고, 그녀와 희빈의 대립 구도를 그린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흥미로운 소재가 되고 있다. 드라마 <동이>에서는 희빈 장씨가 대비 명성왕후를 독살하고 그 죄를 인현왕후 민씨에게 뒤집어 씌워 폐위에 이르게 하였다.
과연 인현왕후는 실제로 왜 폐위되었으며, 당시 사람들은 이 사건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 역사서를 통해 본 민씨의 폐위 정황
인현왕후 민씨의 폐위 사실은 1689년(숙종 15) 5월 2일 숙종의 비망기(備忘記)와 5월 4일 교서(敎書)를 통해 공식화되었다.<비망기1, 비망기2, 교서> 이 기록에 의하면, 장씨가 왕자[훗날의 경종]를 잉태하기 전 인현왕후의 꿈에 선왕[현종]과 선후[명성왕후]가 나타나‘민씨와 장씨는 본래 원수지간으로 현재 장씨가 복수하려 하며, 경신환국 후 원한을 품은 이들과 결탁하여 나라에 화를 미칠 것이다. 그리고 장씨 팔자에는 아들이 없고 민씨에게는 자손이 많을 것이다.’라고 말한 사실을 숙종에게 고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후 장씨가 왕자를 낳으면서[1688년(숙종 14) 10월 27일] 민씨는 궁지에 몰리기 시작했다.
15세에 왕위에 오른 숙종은 두 왕비[인경왕후 김씨, 인현왕후 민씨]와 후궁[귀인 김씨]을 맞이했지만, 나이 서른이 다 되어서야 장씨에게서 아들을 얻었으니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랬기에 생후 두 달이 갓 지나 당시 ‘자의대비 조씨[숙종 조모]의 상중(喪中)일 뿐만 아니라 중전 민씨가 회임할 수 있음’을 강조하는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원자로 정했던 것이다.[1689년(숙종 15) 1월 15일] 이러한 상황 속에서 민씨는 아들도 못 낳으면서 ‘투기’로 폐위된 성종 비 윤씨보다도 더 큰 죄인으로 치부되며 폐위의 수순을 밟았다.
■ 서사물 『인현왕후전』을 통해 본 민씨의 폐위 정황
숙종과 인현왕후 민씨, 그리고 희빈 장씨의 삼각관계가 당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 것은 김만중(金萬重, 1637-1692)이 지은『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당시 서인 측에 속했던 김만중이 “명나라 한림학사 유연수가 간교한 첩에게 속아 본처 사씨를 쫓아내었다가 이후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 정실로 맞이한다”는 내용으로 인현왕후 민씨의 복위를 목적으로 지은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중국을 배경으로 허구성이 가미된 풍자소설이지만 당대의 분위기를 어느 정도 읽어낼 수 있다.
이후 인현왕후의 이야기는 애초에 궁녀의 손에서 필사된 이야기가 후대에 내려오면서 여러 사람에 의해 글로 남겨져 현재 필사본만 20여 종에 이른다.[필사본의 제목은 ‘민중전 인현왕후덕행록’,‘인현성모민씨덕행록’ 등 다양하지만 편의상“인현왕후전”으로 통칭되고 있다.] 모두 한없이 어진 인현왕후 민씨가 희빈 장씨의 갖은 모략으로 폐출되어 6년 동안이나 궁궐 밖에서 생활했으나 아무도 원망하지 않았음에 초점을 맞추어 민씨를 우상화하는 반면 장씨를 악녀로 비하하는 내용이다. 여러 종의 책 중에서 가장 후대에 만들어져서 구성이 잘 짜이고 내용이 풍부한 『인현셩모민시덕행녹(仁賢聖母閔氏德行錄)』을 중심으로 당시의 정황을 살펴보자.

『인현셩모민시덕행녹(仁賢聖母閔氏德行錄)』(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인현왕후전>에서는 희빈 장씨가 왕자를 생산한 뒤 인현왕후를 모함하였고, 숙종은 장씨의 말에 현혹되어 폐위를 단행한 것으로 서술하였다.
희빈 장씨 처음으로 왕자를 탄생하니, 상께서 지나치게 사랑하심은 이를 것도 없고 왕후도 크게 기뻐하시어 어루만져 사랑하시기를 낳은 자식같이 하셨다. 장씨가 분수를 알았다면 그 영화를 어찌 측량하리오. 문득 참람한 뜻과 방자한 마음이 불 일 듯하니 중궁전의 성덕과 용색이 뛰어나고 인망이 다 돌아감을 시기하여 가만히 제어하고 대위(大位)를 엄습코자 하였다. 그 참람한 역심(逆心)이 더욱 심하여 날로 기색을 살펴 중전을 참소하려 하는 말이 ‘새로 태어난 왕자를 짐살(鴆殺, 짐새의 독을 넣은 술로 살해하는 것)하려 한다’ 하고 또 ‘희빈을 저주한다’ 하면서 모략과 계책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어 간악한 후빈들과 결탁하여 말을 만들고 자취를 드러내어 상이 듣고 보시도록 하였다. 예로부터 악인을 의롭지 않게 돕는 자가 있었다.
중전이 간악하단 말이 날로 무성하니 상이 점점 의심하시어 중궁을 아주 박대하시고, 장씨는 요악한 태도로 천심을 영합하며 왕자로 인하여 권세가 더욱 대단하니 상이 점점 한쪽으로 치우쳐 흑백을 분변하지 못하셨다. 지난날 엄정하시던 성도가 매우 변감하시어 현인군자는 다 물리치시고 간신적자를 많이 쓰시니 조정이 그윽히 의심하였고, 후께서 근심하시어 장씨의 사람됨이 반드시 변고를 낼 줄 아셨으나 왕자가 당당한 기상이 있음을 아시고 다행스럽게 여기시어 깊이 생각지 않으시고 더욱 숙덕성심(淑德誠心)을 행하셨다. 이듬해 기사년 여양부원군이 돌아가시니 후가 망극애통하시어 장례를 지내시되 실과와 좋은 육찬을 진어치 않으시고 망극함을 마지않으셨다.
상은 이미 결단하신 마음이 계신 까닭에 발설치 않으셨으나 민간에 ‘중전을 폐위한다’는 소문이 자자하였다. 4월 23일은 중궁전 탄일이라, 각 궁과 내수사에서 공상단자(供上單子)를 올리니 상께서 단자를 내치고 음식을 다 물리치시며 대신과 2품 이상의 신하들을 인견하시어 폐비(廢妃)하심을 전교(傳敎)하셨다.
 『인현셩모민시덕행녹』의 9-10장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당시 숙종의 입장에서‘인현왕후가 희빈 장씨를 투기하여 모함한 것’을 폐위의 원인으로 거론했던 반면에, <인현왕후전>에서는 ‘희빈 장씨가 참람한 마음을 품고서 인현왕후를 모함하고 숙종을 현혹하여 폐비가 결정된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즉, 인현왕후 민씨는 맑은 덕성과 진실한 성품을 지닌 인물로서 희빈 장씨가 낳은 아들을 친자식처럼 아낄 정도로 어질었으나, 악한 성품을 지닌 장씨가 분수를 모르고 인현왕후를 모함하여 폐출시켰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숙종이 장씨를 두둔하고 민씨를 박대할 때에는 흑백을 분변치 못한다고 비판하였고, 숙종이 민씨를 복위시킬 때에는 성인군자로 치켜세웠다.
인현왕후의 폐위 당시에는 완전히 상반된 내용으로 서술되었던 두 기록은, 6년 뒤 민씨가 복위되면서 동일한 견해를 보인다. 즉 민씨가 복위된 후 병(폐위 당시에 이미 병환의 조짐이 보임)으로 죽자, 이것은 순전히 ‘장씨의 저주’에 의한 것으로 장씨를 악녀로 지칭하면서 사사할 수밖에 없는 인물로 규정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은 왕권을 수호하는 입장에서 쓰였기에 민씨와 장씨에 대한 태도를 상황에 따라 달리 서술하였고, 서사문학 <인현왕후전>은 민씨를 어진 왕후로 높이고자 하는 목적으로 쓰였기에 일관되게 성녀로 묘사하고 장씨는 악녀로 묘사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필자 : 이경혜(안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 참고문헌
이경혜,『인현왕후전 연구』, 경희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