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라마 <동이>의 시대적 배경은 1681년, 숙종이 보위에 오른 지 7년째 되던 해였다. 드라마는 대사헌 장익헌의 암살로부터 시작된다. 뿐만 아니다. 형조판서와 이조참판 역시 피살된 것으로 밝혀져 거대한 음모가 꿈틀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남인의 세 수장으로 밝혀진 이들을 죽인 자들은 과연 누구인가? 남인과 대립하던 서인세력인가? 아니면 하층민의 분노를 대변하던 검계인가? 드라마에서는 이들을 죽인 자들이 서인도 검계도 아닌 남인 내부의 권력 다툼이었음을 드러내어 시청자들을 경악케 하였다. 1681년, 피비린내 나는 남인 내부의 권력 다툼은 과연 사실이었을까?
14살의 어린 왕, 숙종이 즉위하자(1674년) 조정의 주도권은 남인세력으로 넘어갔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으로 옹립한 반정이 성공한 후 실로 40여년 만에 서인이 정권으로부터 물러나게 된 것이다. 남인 정권의 성립에는 숙종의 외척인 김석주(金錫冑)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하였다. 청풍김씨 김석주는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明聖王后)의 사촌오라비로 숙종 초반을 대표하는 외척세력이었다. 그런 그에게 가장 걸림돌이 되는 이는 서인의 수장인 송시열이었다. 숙종은 즉위하자마자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한 송시열의 예론이 잘못이라고 단정하며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들을 축출할 발판을 마련하였고, 이를 곧 실천하였다. 비대해진 서인세력을 대신하여 남인세력을 발탁하되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외숙 김석주를 정권의 한 축으로 둔 구도였다.
그러한 구도도 오래 가지 않았다. 1680년에는 남인들이 대거 실각하고 조정의 요직은 서인에게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른바 경신환국(庚申換局)이다. 집권 남인 세력을 대표하던 허적(許積)이 집안잔치에 허락도 없이 왕실의 장막과 차일을 가져다 쓴 일을 빌미로 숙종은 남인들을 대거 물갈이 한 것이다. 표면적인 이유가 그러했을 뿐 남인의 물갈이는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집권 남인들에게 염증을 느낀 숙종의 태도 변화는 이미 지난해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이러한 경신환국을 배후에서 주도면밀하게 계획했던 이 역시 김석주였다. 그는 권력을 더욱 자신에게 집중시키기 위해 집권 6년차 남인세력을 실각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이에 그치지 않고 남인세력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종친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역모사건을 일으켜 대규모 옥사(獄事)가 벌어지게 되었다. 이를 통해 실각한 남인들이 더욱 철저하게 제거되었음은 물론이다.
드라마의 시대적 배경은 바로 이러한 남인의 실각, 서인의 재집권, 연이은 역모사건으로 인한 대규모 옥사가 벌어지던 때이다. 그러한 때이니 남인 내부의 권력다툼이 심화되어 암살사건에 이른다는 것은 드라마상의 사건 전개를 위한 허구일 따름이다.
숙종조 정국에서 남인이 정권을 잡은 것은 갑인 예송 직후인 1674년에서 경신환국이 일어나던 1680년까지 6년, 기사환국이 일어나던 1689년에서 갑술환국으로 축출되던 1694년까지 5년이다. 드라마의 출발점인 1681년에 남인은 중앙 정계로부터 소외되어 있었으므로 내부 권력 다툼을 할 입장이 되지 못하였다. 남인과 서인의 밀고 당기는 대립양상이 시작되는 것은 희빈장씨가 훗날의 경종이 되는 왕자를 낳은 1688년 이후가 되어서이다.
필자 : 김학수(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국학자료조사실 실장)
■ 참고문헌
이성무, 『조선시대당쟁사2』, 동방미디어, 2000.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조선후기당쟁의 종합적 검토』,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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