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5년 5월, 국정에 대해 신하들과 토론하던 영조 임금은 신하들이 검계(劍契)라는 이름을 들먹이자, 도대체 그 명칭이 왜 생겨났는지 궁금해 하였다. 칼을 만들기 때문에 부르는 이름인지 아니면 이들이 칼을 쓰기 때문에 생긴 것인지, 또 어떤 자들이 검계에 가입하는지 몹시 의아해 하였다. 이에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칼로 사람을 죽이기 위해 만든 단체가 검계이며, 주로 양반가의 사나운 종이나 머슴들이 가입한다’고.(『승정원일기』 영조 11년(1735) 5월 25일)

1623년 인종반정 이후 조선 정부는 서울의 향도계 해체를 위해 대대적으로 강공책을 편다. 초상시 상여를 메는 조직인 향도계가 반(反)양반 조직으로 변모해갔기 때문이다. 향도꾼들은 이에 부단히 저항하였다. 그 일부는 해체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조직적이고 과격한 단체가 탄생하였다. 바로 이 단체가 검계였다. 주인과 부모를 배반한 노비와 양인 청년들이 주로 가입하였고, 향도계보다는 사람수가 적지만 통상 40~60명이 한 단위가 되었다. 이들은 주민들의 개와 돼지, 닭을 함부로 잡아먹거나 밤낮으로 모임을 가져 조직력을 키우는가 하면, 서울과 지방의 도적들과 연계하며 그 세력을 키워나갔다. 포도청에서조차 이 같은 행위를 걱정만 할뿐 금하지는 못하였다. 초상이 나면 상여를 메고 날라야 하니 이들을 완전히 없앨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당시 국정을 총괄하였던 영의정 남구만조차 이들 조직의 혁파는 어렵다고 고백하였다.
(『승정원일기』 숙종 20년(1694) 9월 3일)
검계는 조직마다 오늘날의 ‘조폭’처럼 각각 특정한 명칭을 붙였다. 별자리 이름을 따다가 ‘28수(宿)계’라고 부르거나, 고상한 선비들을 흉내 내어 ‘죽림칠현(竹林七賢)’이라 하기도 했다.
(『승정원일기』 영조 11년(1735) 5월 23일)
검계 조직원들은 한편으로는 향도계와 연계하여 사대부들의 상여메는 일을 그 존립기반으로 삼았으며, 또 한편으로는 중앙과 지방의 사회 불만세력과 연계하여 사회 변혁을 꿈꾸었다. 상전의 부당한 대우와 노동력 착취에 우는 노비, 그리고 가부장적 유교질서에 숨막혀하던 하층민들은 그 탈출구로 검계를 구성하고 활약하였던 것이다. 또한 숙종대를 중심으로 노론과 남인의 대립, 혹은 같은 당파내의 경쟁과 분쟁은 이들 검계 세력이 정치세력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출처:규장각『승정원일기』영조 11년(1735) 5월 25일
『승정원일기』에는 검계를 비롯한 하층민들의 동요가 일어난 원인을 왕과 신하가 함께 진단한 대목이 실려 있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기아와 도탄에 빠진 민생을 외면한 채 양반들이 벌이는 당파 싸움이 하층민들의 눈에 너무나도 한심해 보였다는 것이다. 두 번째 원인은 과거 특히 무과에서 무더기로 합격자를 양산하는 국가 기강의 문란이었다. 세 번째는 이른바 ‘전화지행(錢貨之行)’ 즉 화폐의 유통으로 양반들의 부정부패가 심해지고, 이로 인한 일반 서민의 박탈감이 가중되었다는 것이다. 네 번째로는 호패법 실시에 따른 이서배의 농간이 지적되었다. 인구를 파악하고 거주를 제한하는 호패법은 하층민의 발을 묶는 것으로서 이들의 삶의 동력을 빼앗는 일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승정원일기』 숙종 13년(1687) 11월 24일)
향도계가 양반에 대한 비교적 온건한 비판세력이었다면, 검계는 폭력을 무기로 하는 강경한 사회조직이었다. 이 때문에 정보가 보고되는 즉시 일망타진되곤 하였지만, 서울을 중심으로 19세기 초반 순조 대까지 그 활동이 지속되었다.
필자: 안승준(한국학중앙연구원 고전자료정보화연구실 실장)
■ 참고문헌
정석종, 『조선후기사회변동연구』, 일조각, 1983.
이수광, 『조선의 방외지사 - 시대에 맞서 삶을 뜨겁게 살았던 조선시대 비주류들의 이야기』, 나무처럼, 2008.
이수광, 『잡인열전 - 파격과 열정이 살아 숨 쉬는 조선의 뒷골목 히스토리』, 바우하우스,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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