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동이>에서 자주 등장하는 관청은 “장악원(掌樂院)”이다. 동이의 오빠 동주가 해금을 연주하는 악공으로 소속되어 있었고, 동이가 포청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잠시 몸 담는 곳으로 나온다. 장악원은 글자 그대로 ‘음악을 관장’했던 예조(禮曹) 소속의 정3품 관청이었다.
조선은 백성을 교화하여 다스리는 ‘덕치(德治)’를 지향했기에 예(禮)와 악(樂)을 중시했다. 그러므로 음악은 통치 방편의 하나로 인식하여 별도로 음악을 담당하던 기관을 두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장악원 제조를 지냈던 성현(1439~1504)이 장악원 건물이 완공된 뒤 기록한 「장악원제명기(掌樂院題名記)」에서도 알 수 있다.
성현『허백당문집』에 수록된「장악원제명기」
“사람으로서 가히 음악을 알지 못할 수 없을 것이니, 음악을 모른다면 우울하고 폐색되어 무엇으로도 그 기운을 펼 수가 없을 것이요, 나라에 하루 동안이라도 음악이 없을 수 없으니, 음악이 없다면 침체하고 야비하여 무엇으로도 그 화기를 이룩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선왕(先王)이 음악의 방법을 세우고 음악의 관원을 설치하여 인심의 같은 바로 감발(感發)하고 징계하여 가다듬게 하는 바가 있게 한 것이다.”
조선시대의 음악은 민간에서 우리말로 익히는 향악(鄕樂)과 중국에서 유래한 조회음악인 당악(唐樂), 그리고 제사음악인 아악(雅樂)으로 구분된다. 조선 초에는 향악 및 당악 전문기관인 전악서(典樂署)와 아악 전문기관인 아악서(雅樂署)를 두었으나, 모두 통합하여 장악서(掌樂署)라 했다가 좀더 규모를 갖추어 ‘장악원’이라 하였다.(『世祖實錄』 ) 장악원은 ‘이원(梨園)’이라 불리기도 했다.
장악원에서는 주로 국가와 왕실의 공식적인 행사에서 음악과 춤을 맡고 있었다. 역대 왕과 왕비의 제사를 지내는 종묘제례를 비롯하여 사직제, 풍운뇌우제, 선농제, 선잠제, 문묘제례 등과 같은 제사뿐만 아니라 임금과 나라를 위해 공헌한 공신들과 왕실 가족의 잔치인 진연과 진찬, 그리고 노인들을 위한 양로연, 외국 사신을 위한 연향에서 연주자들과 무동, 기녀 등이 음악을 연주하고 춤을 추었다. 악인들은 왕이 특별히 민간에 음악을 내려줄 때 양반의 사가에서 연주를 하기도 했다.
장악원에서 잔치하는 그림 「이원기로회도」
음악과 춤을 공연할 뿐만 아니라 교육과 연구 및 정책기관으로서의 역할도 컸다. 경륜이 깊은 악공(樂工)은 악사(樂師)가 되어 스승으로서 후배 악공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관리로서 예악에 밝은 제조 이하 악관들은 음악 정책과 제도, 악장(가사), 의례와 음률, 그리고 춤의 쓰임의 옳고 그름, 그리고 악기제작 등에 관여하였다.
이처럼 많은 의례에서 공연뿐만 아니라 교육 및 정책까지 맡았던 곳이었기에 여기에 소속된 예술인 또한 꽤 많았다. 시기적으로 변화는 있었으나, 『경국대전』에 따르면 악사와 악공, 기녀 등을 통틀어 약 1000명가량이었다고 한다. ( 『經國大典』 권3 「禮典」 ‘雅俗樂’).
장악원은 일정한 건물이 없다가 성종 대에 비로소 새로 지었는데, 집과 뜰이 넓어 신정과 동지 때 왕이 백관의 조하(朝賀)를 받는 의식을 연습하거나 과거시험을 보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음악 행정 관리들인 당상관과 낭청들의 사무실, 악기를 보관하는 곳, 악공과 기생 등 수천 명이 각기 거처할 장소가 있었다고 하니 큰 규모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을지로 2가 외환은행 앞에서 옛 터를 발견할 수 있다. 장악원의 전통은 오늘날 국립국악원이 이어가고 있으며, 공연부서의 이름은 ‘장악과’다.
필자: 서인화(국립국악원 학예연구관)
■ 참고문헌
서인화,「掌樂院의 官員․樂人․習樂 - 조선왕조실록의 관련 기사를 중심으로」,『역대국립음악기관연구』, 국립국악원, 2001.
서인화,「19세기 장악원의 존재양상」,『동양음악』24, 서울대학교 동양음악연구소, 2002.
한국음악학자료총서 37 『조선시대음악풍속도Ⅰ』, 국립국악원,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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