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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악공은 어떻게 선발되었나? 조회수 : 15867 
 

동이의 오빠 동주는 장악원의 악공으로 해금을 연주한다. 천인 신분으로 어떻게 중앙 관청에 들어갈 수 있었을까?

장악원 소속의 음악인 ‘악공(樂工)’은 향악과 당악을 연주하는 음악인을 가리킨다. 장악원에는 악공 외에 아악을 연주하는 악생(樂生), 스승인 악사(樂師), 여기(女妓), 무동(舞童) 등이 있었다. 따라서, 악공을 국역을 수행하는 자로서 차출하고, 악공의 임무 수행에 필요한 경제적인 부담을 봉족을 통해 부담하게 했다.

악공과 악생은 같은 연주자이지만, 제례악을 담당하는 악생의 신분이 더 높았다. 악공은 우방(右坊)에 속하여 관노(官奴) 즉 관청의 남자종에서 차출했던 반면에, 악생은 일반 양인을 차출하되 주로 악생의 자제들을 썼다. 음악에 대한 기예, 기능의 세습과 전수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正祖實錄』) 그러나 일정 단계에 이르면 실력을 가늠할 수 있는 시험, 즉 취재(取才)를 보아 선발했다. 취재란 ‘재주를 시험’하는 것으로 주로 통역관, 의관, 음양관 등 중인들을 선발할 때에 쓰던 방식이었다. 악공의 경우에는 무작위로 제비를 뽑아 시험곡을 연주하여 선발했다. 이들이 자격을 갖추어 일정기간이 지나면 승진하여 품계를 받았다.

장악원에서는 궁중 음악이 잘 전승되도록 음악인들의 세습에 노력을 기울였다.

공역으로 외방에서 올라온 악공으로서 그 자신이 공역(公役)에 나올 수 없으면 전악(典樂)이 그와 가까운 가족 중에서 재예(才藝)가 있는 자를 골라 품삯을 주고 들여 대행하게 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관례인데....(중략)... 장악원 소속은 제사를 담당한 태상이나 성균관과 마찬가지로 자기들 부류의 가까운 친척이 아니면 방외의 인사를 채용할 수 없는 것이 바로 바꿀 수 없는 관례이다. 그런데 일전에 들으니 태상 소속의 아랫것들 중에는 방외의 무리가 많이 섞여있다 하더니 오늘 또 듣건대 장악원도 그렇다고 하니 만일 이렇게 가다가는 성균관 하속들도 방외의 인물들로 섞어놓을 것 아닌가.“ (『正祖實錄』)

여기(女妓)는 여러 관청에 소속된 계집종 중에서 어린 아이를 선발하였고, 악기 연주보다는 주로 춤을 추었다. 조선 전기에는 왕실 여성들의 잔치에서 악기까지 연주했었으나, 인조반정(1623년) 이후에는 여기가 서울에 머무는 관행 자체가 폐지되었다. 그러나 각 고을에는 여기(女妓)를 두어 때때로 행사에 동원하였는데, 이들을 ‘외방기(外方妓)’라 하였다. 이 외방기를 대대로 세습시키려 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음악적 기능 기예의 전승을 위해 세습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외방기가 딸을 낳으면 “각 고을에서 그 나이와 이름을 적어서 장악원에 보고하여 장부에 기록하게 하였다. 또 어려서부터 글과 풍악을 익히며 예도(禮道)를 가르치게 하고, 나이 차면 서울로 올려 보내 간택 받도록 했다. 자기가 살던 지역으로 돌아간 뒤에야 본인 형편대로 살도록 했다.” (『燕山君日記』)

악공과 여기는 모두 천인 혹은 양민 신분이었고, 경제적으로 매우 열악한 하층민이었다. 병자호란 직후 1637년부터 1753년까지 장악원의 일을 기록한『악장등록(樂掌謄錄)』에는 전쟁 직후 이들의 비참한 생활상이 잘 그려져 있다.

전국적으로 동원되어 장악원에 예속되었던 음악인들이 재주를 제대로 익히지 못하는 경우에는 관원들의 일을 거드는 구사(丘史:심부름꾼)로 쓰기도 했다.(『中宗實錄』)

 

 

필자: 서인화 (국립국악원 학예연구관)

 

■ 참고문헌
김종수,「조선조 17․18세기 女樂과 男樂」,『한국음악사학보』제11집, 한국음악사학회, 1993.
서인화,「장악원 연주자 계보로 본 궁중음악의 전승-종묘제례악을 중심으로」,『국악학 학술회의-종묘제례악의 전승』,
            국립국악원, 2003.
송지원,「조선시대 장악원의 악인과 음악교육 연구」,『한국음악연구』43, 한국국악학회, 2008.

 

(드라마 이미지 출처 : MBC 드라마 '동이' 공식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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