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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현왕후는 왜, 어떻게 폐위되었나?
。숙종의 후계자는 어떻게 결정되었나?
。숙빈 최씨와 숙종의 인연은 어떻게 맺어졌을까?
。영조, 어머니 숙빈최씨의 이름을 바꾸다?
。궁녀의 인생역전, 과연 만만한 일인가?
。궁녀 위의 궁녀, 감찰 상궁이 존재했을까?
。희빈 장씨의 출신은 무엇이었을까?
。장희빈, 당쟁의 주모자인가 희생양인가?
。동이[숙빈최씨]는 천민 출신이었을까?
。영조가 어머니를 위해 지은 비문


。장악원은 어떤 곳이었을까?
。악공은 어떻게 선발되었나?
。조선시대 악보는 어떤 모양이었을까?
。왕실 잔치의 공연복은 어떤 것이었나?
。남인 세 수장의 피살, 과연 사실인가?
。검계, 그들은 누구인가?
。검계의 전신, 서울 향도계
。조선시대의 CSI, 오작인은 누구인가?
。조선시대 검시는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 영조가 어머니를 위해 지은 비문 조회수 : 95025 
 



소령묘갈(昭寧墓碣)

사친(私親)은 본관이 수양(首陽)이요, 우리 성고(聖考)이신 숙종대왕의 후궁이다. 경술년(1670: 현종11) 11월 6일에 여경방(餘慶坊) 사제(私第)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된 효원(孝元)이고, 모친은 정경부인에 추증된 홍씨(洪氏)이다. 조부는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된 태일(泰逸)이고, 조모는 정경부인에 추증된 장씨(張氏)이다. 증조부는 이조판서에 추증된 말정(末貞)이고, 증조모는 정부인에 추증된 장씨(張氏)이다. 외조부는 통정대부인 계남(繼南)이고, 외조모는 김씨이다.

빈(嬪)께서는 일곱 살에 궁중으로 들어오셨다. 처음에는 숙의(淑儀)와 귀인(貴人)에 봉해졌다가 다시 숙빈(淑嬪)으로 진봉(進封)되었으니 이는 내명부 정1품의 품계이다. 빈께서는 세 명의 왕자를 낳았는데 나는 그 중에 둘째다.

즉위 원년(1725) 순화방(順和坊)의 도성 북쪽 산기슭 아래에 사당을 건립하였고, 즉위 10년 갑인(1734) 2월에 비로소 빈의 고비(考妣)를 추증하였다. 즉위 20년 갑자(1744) 정월에는 다시 빈의 조고(祖考)와 조비(祖妣), 증조고(曾祖考)와 증조비(曾祖妣)를 추증하였다. 3개월 후, 묘호(廟號)를 육상(毓祥)으로 묘호(墓號)를 소령(昭寧)으로 정했는데 제사를 받들어 모시는 사람은 대원군 봉사손의 예에 따라 4대 이후에 돈녕정(敦寧正)을 세습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전감(典監)을 두어 묘(墓)를 지키게 함으로써 체모를 높였다.


(그림) 숙빈최씨소령묘갈 탁본


아! 오늘 이후로 사친께서 예전에 지니셨던 현철한 덕이 현양될 수 있거니와 높이 떠받들어 근본에 보답하고 싶은 자식으로서의 도리가 다소나마 풀릴 수 있으리라.

나는 2남 10녀를 두었다. 효장세자(孝章世子)는 정빈(靖嬪)이 낳았는데, 세자빈인 현빈조씨(賢嬪趙氏)는 바로 풍릉부원군(豊陵府院君) 문명(文命)의 딸이다. 세자는 영빈(暎嬪) 소생으로 을묘년(1735: 영조11) 처음으로 원자에 봉해졌고, 병진년(1736: 영조12)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갑자년(1744: 영조20)에 가례를 설행하였다. 빈(嬪) 홍씨(洪氏)는 바로 세마(洗馬) 봉한(鳳漢)의 딸이다. 둘째 딸 화순옹주(和順翁主)는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에게 하가(下嫁)하였고, 셋째 딸 화평옹주(和平翁主)는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에게 하가하였으며, 일곱째 딸 화협옹주(和恊翁主)는 영성위(永城尉) 신광수(申光洙)에게 하가하였다. 아홉째 딸 화완옹주(和㣪翁主)와 열째 딸 옹주는 아직 어리다. 지금 묘갈문을 찬술하면서 묘표(墓表)와 비문(碑文)에 누락시킨 것을 모두 기록한다.

아! 지금 비석을 세우는 것은 정해진 호(號)를 드러내어 후세에 전하기 위함이다. 만약 터럭만큼이라도 과장된 뜻이 있다면 어찌 예전에 삼가시던 도리를 실천하는 것이겠는가! 전․후면에 대자(大字)와 음기(陰記) 및 전자(篆字)를 직접 쓰고, 묘표와 묘비(墓碑), 묘갈(墓碣)을 세운 곳과 갈석(碣石)을 세운 날짜를 서평군(西平君) 요(橈)에게 명하여 농대석(籠臺石) 위에 선사(繕寫)함으로써 훗날 고증의 자료로 삼게 하였다. 그리고 동년 8월, 길일을 택하여 묘소 좌측에 세울 것이다.

아! 25년 동안 낳아주고 길러주신 은혜에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할 수 있을 듯하다. 지금 비문을 지음에 문임(文任)의 신하를 버려두고 내 스스로 소략하게 기술하는 것은 또한 자식으로서 사친의 삼가는 마음을 체득한다는 의미이다. 붓을 잡고 글을 쓰려하니 눈물과 콧물이 얼굴을 뒤덮는다. 옛날을 추억하노니 이내 감회가 곱절이나 애틋하구나.

황명(皇明) 숭정(崇禎) 기원후 117년 갑자(1744) 7월 15일에 삼가 쓰다.

출처 :『숙빈최씨자료집4: 산도, 비문』


■ 참고문헌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숙빈최씨자료집4: 산도, 비문』, 한국학중앙연구원,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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