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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검시는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 조선시대 검시는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조회수 : 15394 
 


미국드라마 < CSI과학수사대> 에서 시신 검안을 통한 과학적인 수사를 세밀하면서도 생생하게 방영한 후로 드라마나 영화 속 ‘검시’ 장면은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되었다. 또 이러한 분위기를 타고 조선시대판 CSI <별순검>이 제작되고 호응을 얻으면서 시청자들의 ‘조선시대 검시’에 대한 호기심 또한 커진 것이 사실이다.

조선시대에는 살인 사건이 발생하면 신중하고도 엄격한 절차를 거쳐 검시가 이루어졌다. 이는 당시 법의학 지침서로 쓰인『무원록(無寃錄)』과 조선시대 사체 검시 보고서인『검안(檢案)』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무원록』의 「시형도(屍型圖)」     『증수무원록언해』

                        『무원록』의 「시형도(屍型圖)」                                                 『증수무원록언해』


먼저 검시의 책임자는 누구였을까? 변사 사건의 1차 수사는 시신이 놓여진 장소의 관할 관리가 담당하였다. 서울의 경우 지금의 구청장 급에 견줄 수 있는 부장(部長)이, 지방의 경우 시장․군수에 해당하는 고을 수령(守令)이 수사를 총괄하였다. (『대전회통(大典會通)』권5, 형전(刑典) 「검험(檢驗)」 참조) 사건 현장에 관리가 출동할 때에는 아전들을 보조 인력으로 데리고 갔는데, 이들이 시체를 다루는 일에서부터 관련자 심문 등의 제반 실무를 담당하였다. 이 때 사건 수사의 핵심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시체의 사망 원인을 밝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목격자나 관련자들의 증언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럼 사망 원인은 어떻게 찾아냈을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는 싸늘한 시신을 앞에 두고 자살인지 타살인지를 가려내고, 행여 억울한 죽음은 아닌지 분석하기 위해서는 법의학적 지식이 총동원될 필요가 있었다. 『무원록』은 이 때 참고해야 할 필수적인 책자였다.

요즘처럼 첨단 장비와 과학 기술의 도움을 받지는 못했지만,『무원록』에서는 사망 원인 조사에 사용할 수 있도록 술, 식초, 소금, 파, 매실, 백반, 은비녀 등 여러 가지 검시용 재료를 제시하고 있다. 이들 검시용 재료를 ‘응용법물(應用法物)’이라고 하였다. 검시관은 이들 재료 등을 이용하여 시체의 머리부터 검안하기 시작하여 신장과 얼굴의 빛깔, 팔과 다리, 피부의 손상 여부 등 모든 신체 부위를 상세히 살펴보고 조사하였다. 시신이 부패하는 과정과 소요 기간을 통해 사망 시간을 추정하고, 시체의 몸 색깔에서 기본적인 사망 원인을 판별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몸 색깔과 함께 시신에 나타난 상처나 흔적도 중요 관찰 대상이었다.

『무원록』에는 이밖에도 여러 가지 흥미로운 검시 기법이 소개되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은비녀를 이용한 중독 여부 판정이다. 이 방법은 독에 반응하는 은의 성질을 이용한 것인데, 죽은 자의 목구멍에 은비녀를 넣어두고 입을 종이로 봉하였다가 얼마 후 은비녀를 빼냈을 때 은비녀의 색이 푸른빛을 띤 검은색으로 변하면 독살임을 알 수 있었다.

검시관이 검시 재료를 동원하여 시신의 사망 원인을 확정하고, 목격자를 비롯한 관련자들의 심문을 종합한 보고서를 상부 관서에 보고하면 1차 검시는 끝이 난다. 그러나 사람의 인명이 달린 살인 사건의 경우 시신 검시와 수사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어지는 2차 검시는 수사의 공정성을 위해서 동일인이 하지 못하게 했으며, 이에 따라 지방의 경우는 이웃 고을 수령이, 서울의 경우는 한성부의 낭관(郎官)이 맡았다. 두 차례의 검시를 통해서도 사망 원인이 애매한 경우에는 심지어 3차, 4차 검시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원통한 죽음, 억울한 죄수를 없애고자 하는 노력이 조선시대 검시 절차에 제도화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필자:심재우(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 참고문헌
『증수무원록(增修無冤錄)』,『대전회통(大典會通)』
심재우, 「조선후기 인명 사건의 처리와 ‘검안’」 『역사와 현실』23, 한국역사연구회, 1997
심희기,『한국법제사강의』, 삼영사, 1997
김호 옮김,『신주무원록』, 사계절,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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