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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가 어머니를 위해 지은 비문


。장악원은 어떤 곳이었을까?
。악공은 어떻게 선발되었나?
。조선시대 악보는 어떤 모양이었을까?
。왕실 잔치의 공연복은 어떤 것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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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CSI, 오작인은 누구인가?
。조선시대 검시는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 조선시대 악보는 어떤 모양이었을까? 조회수 : 19587 
 

 

드라마 속에서 장악원 소속의 노비 동이가 악공들의 연주에 앞서 악보 수발을 드는 모습은 꽤 인상적이다. 왕실의 주요 인사가 참관한 잔치에서나 숙종이 상궁 장씨[장희빈]를 위해 음악 연주를 시킬 때나 악공들은 모두 악보를 앞에 펼쳐놓고 보면서 연주했다. 조선시대에도 지금의 오선악보와 같은 것이 있었을까? 있었다면 과연 어떤 모양이었을까?

조선시대의 악보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 발견할 수 있다. 세종은 궁중 의식에서 조선 건국의 위업을 찬양하기 위해 향악(鄕樂)과 고취악(鼓吹樂)을 바탕으로 신악(新樂), 즉 ‘새 음악’을 창제했다. 세종이 만든 신악의 악보는 정간보(井間譜) 형식이다. 정간보는 우물 정(井)자 모양의 칸(□)에 음(音) 이름을 적어 넣어 음의 높이와 길이를 동시에 표시한 악보이다. 음길이가 동일한 4음 1구로 되어 있는 아악(雅樂)과 달리 불규칙적인 시가를 가진 향악을 기록하는데 매우 효율적이어서 지금까지도 궁중 및 민간에서 전승된 음악을 표기하는데 가장 많이 활용되고 있다.

세종대의 악보는 각 행이 32정간으로 이루어져 있고 위에서 아래로 읽는다. 오른쪽 첫 2행은 선율, 제3행은 장구 장단, 제4행은 박, 제5행은 가사를 기록한 총보이다.첫 행의 붉은 색은 본래 음이름의 한 옥타브 위를 표시한 것이다. 각 음의 높이는 황종, 대려, 태주 등 12개 음이름을 그 첫 자만 적어 표시한다. 예를 들어 음계의 첫 음인 황종(黃鐘)은 간단히 ‘黃’ 이라고만 적고, 한 옥타브 아래 음은 ‘亻’을 붙여서 ‘僙’으로 적는다.

 

 

 

『세종실록』 의 보태평 중 희문(熙文)

 

 

세조는 오음약보(五音略譜)를 창안했는데, 각각의 음이름 대신 중심음인 궁(宮)을 중심으로 위아래로 다섯 음의 음높이를 적은 것이다. 그리고 각 행 16정간을 3, 2, 3, 3, 2, 3정간으로 구분하는 굵은 가로 줄을 그어 6개의 대강으로 구분하였다.

 

 

 

 

『세조실록』 보태평 중 희문

 

 

또한, 성종의 명으로 성현(成俔, 1439-1504) 등이 1493년에 편찬한 『악학궤범(樂學軌範)』에는 여러 글자를 합하여 연주법을 자세히 기록한 합자보가 실려 있는데, 명종 16년(1561) 장악원 첨정 안상(安瑺, 1511-1573)이 합자보를 이용하여 『금합자보(琴合字譜)』를 편찬했다.

 

『악학궤범』

『금합자보(琴合字譜)』

『금합자보』 서문에서 악공을 취재(取才) 즉 시험을 볼 때 악보를 참고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내가 가정 신유년(1561)에 장악 첨정이 되어 그 악공을 취재하는 보책(譜冊)을 보니 예전의 합자보를 버리고 다만 거문고의 상하괘차(上下卦次)만 있고 손가락을 사용하는 방법과 술대를 사용하는 법이 없으니 거문고를 처음 배우는 데 있어서 환히 알 수 없다. 이에 악사 홍선종(洪善終)으로 하여금 당시의 가락과 곡조를 취하여 약간의 악조를 보태고 합자보를 개수하게 하였으며, 또 허억봉(許億鳳)으로 하여금 적보(笛譜)를 만들게 하고, 이무금(李無金)으로 하여금 장구와 북 등 타악기의 악보를 만들게 하고 그 가사와 구음을 함께 기록하니…… (『금합자보(琴合字譜)』「금보서(琴譜序)」)

  

『금합자보』의 악보는 오른쪽 첫 행부터 거문고의 선율을 오음약보와 합자보로 적고, 대금의 선율을 오음약보와 대금 소리와 유사한 구음(口音)으로 적고, 장구와 북의 타점을 실은 총보이다. 첫 정간에 보이는 ‘大’는 거문고의 굵은 줄인 대현(大絃)을, 아래 ‘五’는 5째 괘(지판)를, ‘人’ 은 줄을 누르는 왼손의 식지(食指)를, ‘|’은 거문고 첫 줄인 문현부터 3째 줄인 대현까지를 차례로 이어 치는 연주법을 나타낸다. 

 

 

『금합자보』여민락 중 해동장(海東章)

 

우리나라의 전통음악은 입에서 입으로 구전심수(口傳心授)로 전승되어 왔다. 그러므로 음악을 연주할 때에는 대개 악보를 보지 않았다. 악보는 그저 기록용이자 참고용이었다. 처음 음악을 배울 때도 그 선율을 입으로 외워서 먼저 가락을 익힌 다음에야 악기로 연습했다. 궁중의 잔치를 준비부터 실제 행사까지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한 『진연의궤(進宴儀軌)』에도 악보를 준비했다는 구절은 보이지 않는다. 요사이 국립국악원에서 궁중음악을 연주할 때에도 악보를 보면서 연주하지 않는다.

필자 : 서인화(국립국악원 학예연구관)

 

■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금합자보(琴合字譜)』(『한국음악학자료총서』22집, 국립국악원, 1987, 25쪽)
서인화, 「국악사」, 『초․중등 교사용 국악이론』, 국립국악원, 2007, 223-2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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