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동이>에서 희빈 장씨(禧嬪張氏)는 현재 장상궁으로 나온다. 그럴 듯한 설정이다. 상궁은 궁녀 중에서는 최고지만 정식 후궁은 아니다. 장씨는 현재 애매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숙종이 재입궁을 시킬 정도로 애정이 깊었음에도, 아직 정식 후궁이 되지 못한 이유는 뭘까? 왕과의 성관계 즉 승은(承恩)이 궁녀에게 모든 것을 보장해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 중에도 김상궁은 열네 살 때 선조대왕의 수레를 뫼시고 따라가 잠간도 곁을 떠나지 아니하고 환조하시니 충성 껏 시위한 일로는 대공신을 할 수 있으련만 나인인 까닭으로 반공신도 못하셨지만 궐내위장을 지내시고 궁인 중에서도 위대한 분이시더니 이때에 우두머리를 만들어서 잡아내니 그 사람이 나가는 서문에 앉아서 말하기를, “아무 나라인들 아비의 첩을 나장의 손으로 잡아내니 임금도 사납거니와 신하도 사람다운 사람이 없도다.‧”
『계축일기(癸丑日記)』에 나오는 어느 김상궁의 얘기다. 본인은 왕(선조)의 첩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광해군(光海君) 쪽에서는 관심이 없다.
사실 승은 자체는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쪽에서 인정하지 않으려고 들면 소용없을 여지가 상당히 있다. 확실한 물증이 없기 때문이다. 남녀 간의 문제는 왕이라고 해도 은밀함이 있다. 그리고 왕 자신도 관계한 모든 여자를 챙기는 것은 부담스럽다. 후궁을 들이려면 비용이 꽤 든다. 언제든 궁을 나가 거처할 집도 마련해주어야 하고 품계에 따라 엄청난 토지도 하사해야 한다. 또 여색을 멀리하라는 신하들의 말도 신경 쓰이는 일이다. 때로 왕들에게도 유야무야 넘어가고 싶은 심리가 작동할 수 있다.
그러니 왕의 애정만을 믿을 수는 없다. 궁녀로서는 다음 단계가 반드시 필요했다. 임신을 해야 했다. 아이를 갖는 것 특히 출산은 확실한 물증이다. 왕실의 아이가 태어난다면 왕실로서는 어떤 형태로든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 왕실에서는 후궁이 낳은 아들에게도 왕위계승권이 주어진다. 양반가에서 서자가 집안을 잇지 못하는 것과는 상황이 다르다. 왕은 지존이기 때문에 부인의 위치에 그다지 구애받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궁녀들에게는 그야말로 기회였다. 왕이 될 수도 있는 아이를 나도 낳을 수 있다는 것 말이다.
드라마에서 장씨는 회임을 위해 애쓴다. 실제로도 장씨는 임신을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자신의 인생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장씨는 임신을 하기 전에 이미 후궁으로 봉해지기는 했다. 그러나 그 이후 빠른 승급 또 끝내 왕비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숙종은 경종(景宗)이 태어났을 때 진심으로 기뻐했다. 서른이 다 돼서 얻은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이 아이를 원자로 책봉하는데 반대 했다가 송시열(宋時烈)은 죽음에 이를 정도였다.
숙빈 최씨(淑嬪崔氏)도 마찬가지다. 숙빈 최씨는 숙종과 인연을 맺은 후 몇 달 지나지 않아 임신을 했다. 그리고 나서야 곧 숙원으로 봉해질 수 있었다. 최씨는 연년생으로 아이를 낳았다. 그것도 아들만 둘을. 둘째 아들이 훗날의 영조(英祖)이다. 1693년(숙종 19) 10월 첫째를 낳고 이듬해 9월 둘째를 낳았다. 이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하는 생각도 드는데, 실록의 기록상으로는 그렇다. 이 당시 최씨는 어떤 이유에서든 숙종에게 상당히 어필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이 셋을 낳고 최씨는 숙원(종4품)에서 숙의(종2품)가 되고, 또 귀인(종1품)이 되고 결국은 숙빈(빈: 정1품)이 되었다.
궁녀의 신분 상승에 일차적으로 가장 필요한 것은 왕의 사랑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작일 뿐이다. 왕의 사랑만으로는 부족하다. 결과가 있어야 했다. 아이 그 중에도 왕자를 낳고 볼 일이었다. 적자가 있다면 밀리겠지만, 적자가 없는 상황이라면 궁녀로서도 한번 해볼 만한 일이었다. 조선 숙종 이후로는 유난히 적자가 드물었다.
필자 : 이순구(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 참고문헌
이순구,「『계축일기』에 나타난 궁중생활상」,『사학연구』55․56합집, 한국사학회,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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