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속에서 동이[숙빈 최씨]는 민가를 시찰하던 숙종과 처음으로 만난다. 궁궐 안이 아닌 바깥에서 ‘한성부 판관’과 ‘장악원 노비’의 신분으로 만나 당시의 주요 사건을 함께 해결해나가면서 인연을 맺게 된다는 설정이다. 실제 숙빈 최씨와 숙종의 인연은 어떻게 맺어진 것일까? 현전하는 역사 기록에서 자세한 이야기를 찾아보자.
1725년(영조 1)에 영조가 어머니 숙빈 최씨를 위해 세운 신도비[淑嬪崔氏神道碑]에서는 ‘병진년(丙辰年, 1676)에 궁에 뽑혀 들어가니 겨우 7세였다’는 기록을 발견할 수 있을 뿐, 입궁 전의 생활이나 숙종과의 만남에 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이는 숙빈 최씨의 신분이나 당시 조선 사회의 상황으로 볼 때 당연한 일일 것이다.
 『수문록』
그런데 이문정(李聞政, 1656~1726)이 쓴 《수문록(隨聞錄)》에는 궁궐 밖에 알려지기 어려울 법한 숙종과의 첫 만남이 기록되어 있어 관심을 끈다. 이문정은 사알(司謁)을 지낸 유경관(劉敬寬)에게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어느 날 밤이 깊은 뒤에 선대왕(先大王, 돌아가신 임금 즉 숙종)께서는 지팡이를 짚고 궁궐 안을 두루 다니셨다. 궁녀들의 방을 지나시는데, 오직 한 궁녀의 방에 등촉(燈燭)이 환하였다. 밖에서 몰래 들여다보니 진수성찬을 차려놓았는데, 상 아래에는 한 궁녀가 손을 모으고 꿇어 앉아 있었다.
선대왕께서는 매우 이상하게 여겨서 문을 열고서 그 까닭을 물어보셨다. 궁녀가 엎드려 아뢰었다.
“소녀는 중전의 시녀이온데, 분에 넘치는 총애를 받았습니다. 내일은 중전마마의 탄신일이오나, 어느 누가 찬수(饌需)를 올리겠습니까. 소녀의 정리(情理)로는 슬픔을 이길 수 없어서 중전마마께서 좋아하시던 음식을 갖추어 마련했지만, 이를 올릴 길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마마께 올리는 모양으로 소녀의 방에 음식을 차려 놓고서 제 정성을 펴고자 한 것입니다.”
선대왕께서 비로소 생각해 보니 다음 날이 과연 중전의 탄신일이었다. 곧 감동하여 깨닫는 바가 있었고, 그 정성스런 뜻을 아름답게 여기셨다. 마침내 그 궁녀를 가까이 하였는데, 이로부터 태기가 있었다.
 경자년 11월 초4일의 기사
인현왕후가 폐위되고 희빈 장씨가 중전의 지위를 누리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인현왕후로부터 분에 넘치는 총애를 받았던 궁녀”가 자신이 모셨던 인현왕후를 그리워한 나머지 인현왕후의 탄신일에 올릴 음식상을 마련해 두고서 슬픔에 잠겨 있었고, “우연히” 이를 알게 된 숙종이 그 정성에 감동하였고 결국 동침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과연 얼마나 믿을 만한 것일까? 오늘날의 인물사전 가운데도 이 일화를 인용한 예가 있지만, 《수문록》이라는 책의 성격을 고려한다면 이야기 전체를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어렵지 않을까 한다. 다음은 이 책의 서문 가운데 한 부분이다.
아아. 희빈의 화(禍)는 참으로 크도다. 한 번 돌아서 기사년(1689)의 변란이 되고, 두 번 돌아서 신사년(1701)의 흉변이 되고, 세 번 돌아서 신축년(1721)과 임인년(1722)의 재앙이 있게 되었다. 조정의 선한 무리들이 일망타진(一網打盡) 당하고 종묘와 사직의 위기가 조석(朝夕)에 놓이게 되었던 근원을 따져 보면, 이는 희빈 한 사람에게서 말미암은 것이다.
 『수문록서(隨聞錄序)』
인현왕후와 영빈 김씨가 폐위되고 송시열이 죽임을 당한 기사년의 변란,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를 저주하여 죽게 했다는 신사년의 흉변, 그리고 왕세제(즉 영조)의 대리청정을 주장하던 노론 4대신이 유배되었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 신축년과 임인년의 옥사가 모두 희빈 장씨로 인해 일어난 사건들이라고 이문정은 지목하고 있다. 요컨대 경종과 영조 초의 시대에 노론의 정당성을 주장하고자 하는 것이 이 책의 목표인 셈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수문록》에서는 인현왕후를 지극한 성덕(聖德)을 갖춘 인물로 묘사하고, 희빈 장씨는 그와 정반대의 악인으로 그려내고 있다. 앞에서 살펴본 일화 또한 이러한 구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 일화는 숙종이 세상을 떠난 1720년 11월의 졸곡제(卒哭祭)를 언급한 뒤에 인현왕후의 성덕으로 인해 왕실이 보존될 수 있었음을 진술하는 대목에 등장한다. 희빈이 낳은 아들을 자신의 자식처럼 여겼고 폐위되고서도 원망하는 빛을 보인 일이 없었던 인현왕후의 성덕에 하늘이 감동한 결과, 숙빈 최씨와 숙종이 인연을 맺을 수 있었고 다시 그 사이에서 연잉군(즉 영조)이 탄생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수문록》에서 희빈 장씨를 “고금 천하에 다시 없을 악독한 인물”로 묘사한 대목으로는 죽기 직전에 자신이 낳은 세자(즉 경종)를 해치려 했다는 일화가 대표적이다. 모자의 정을 생각하여 마지막으로 세자를 만나도록 허락했더니, 희빈 장씨는 도리어 악언(惡言)을 퍼붓고는 세자의 하부(下部)에 독수를 써서 세자가 혼절했다는 것이다. 결국 세자가 이로 인해 기이한 질병을 얻게 되었다고 했는데, 경종이 후사가 없었던 이유까지 그 친모인 희빈 장씨의 고의적인 해코지 탓으로 돌린 셈이다.
《수문록》은 당시에 널리 읽혔을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전국의 도서관에 40여종 이상의 필사본이 남아 있는 것이 그 증거이다. 이들 40여종의 이본은 일부 표현의 차이는 있지만―예를 들면 위에 인용한 일화에서는 궁녀(즉 숙빈 최씨)의 답변이 조금씩 다르다― 기본적인 내용은 거의 유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 책이 널리 읽힘에 따라 ‘인현왕후-장희빈’의 극명한 선악 구도가 널리 유포되고, 숙빈 최씨는 인현왕후를 지극하게 받들어서 복을 받았던 인물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자리 잡게 되었을 것이다. 이와 함께 숙빈 최씨가 인현왕후의 은혜를 생각하다가 숙종을 만나서 인연을 맺게 되었다는 이야기 또한 사실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런 때문인지 오늘날의 구비 설화를 채록한 《한국구비문학대계》에도 숙빈 최씨가 숙종을 만난 일화는 나타난다. 횡성읍에서 채록한 설화인 <영조 후비 김씨> 가운데 숙빈 최씨의 일화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 설화에서는 ‘인현왕후의 몸종’이었던 숙빈 최씨가 인현왕후가 머물던 궁에서 생신날 입던 옷을 앞에 놓고 눈물 흘리다가 숙종을 만나 감동시켰다고 하였다. 그리고 숙종에게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의 초상을 그리고 거기에 활을 쏘면서 저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줌으로써 인현왕후가 복위하는 데 공을 세웠다고 했다. 인현왕후의 성덕(聖德) 대신 숙빈 최씨의 지혜가 부각되는 방향으로 이야기의 맥락이 바뀐 셈이다.
《수문록》에서 제시한 숙빈 최씨와 숙종의 만남이 어느 정도까지 사실인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당시의 서인 세력, 그리고 영조대의 노론 가문 등에서는 ‘인현왕후’와 ‘영조’를 연결 짓고자 하는 “희망” 아래 이 일화가 사실로 받아들여졌을 법 하다. 오늘날 사극 ‘동이’에서 그려지는 숙빈 최씨의 모습이 현대인들의 희망이나 욕망을 반영하는 것이듯이, 《수문록》의 기록 또한 어느 정도는 숙종과 경종의 시대를 살아간 당대인(특히 서인·노론 계열 인물)들의 희망을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필자 : 황재문(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교수)
■ 참고문헌
이문정, 『수문록』(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본)
한국학중앙연구원 편,『한국구비문학대계』 2집 6책
최선경, 『왕을 낳은 후궁들』, 김영사, 2007.
이윤우, 『최숙빈의 조선사』, 가람기획,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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