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조(英祖, 1694~1776)의 초상화
영조는 죽은 어머니 숙빈 최씨(淑嬪崔氏, 1670-1718)를 무척 그리워했다. 날이 밝아 오도록 어머니 생각에 잠 못 드는 밤, 영조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어찌 잘 수 있으랴, 무술년을 추억하며, 어찌 잘 수 있으랴, 고령을 생각하네’(「어찌 잘 수 있으랴[御製豈能睡]」)
무술년은 숙빈 최씨가 죽은 1718년을 말한다. 고령은 최씨가 묻힌 곳이니, 어머니를 추모하는 상념에 젖어 어찌 잠을 잘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영조(英祖, 1694~1776)는 이러한 글을 무수히 써나갔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는 영조가 지은 글이 자그마치 약 5,300여 점 소장되어 있다. 대단한 필력이다. 대부분 시와 산문류이다. 「궁원제문편록」에는 영조가 어머니를 위해 직접 써서 올린 제문(祭文) 30여 편이 수록되어 있다. 『어제집경당편집』과 『영조문집보유』에도 제문과 고유문(告由文) 수십 편이 들어있다. 심지어 숙빈 최씨의 상례 과정을 다룬 『무술섬차일기』를 펴내기도 했다. 영조의 지극한 효성이 느껴진다. 효성이 깊은 만큼 회한도 커, 그 격정이 수많은 글로 풀어진 것이다.
영조가 남긴 수많은 글에는 늘 효와 우애, 그리고 충(忠)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대상은 숙빈 최씨뿐 아니라 숙종과 인현왕후, 인원왕후, 경종, 경종비 그리고 효장세자와 현빈, 의소세손 그리고 숙종 이전의 선왕과 명나라 신종 등이었다. 이들을 추모하고 예를 펴는 일은 제삿날은 물론이려니와, 이들에 얽힌 많은 추억속의 날들과 장소 및 역사적 사건 등으로 인하여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개혁을 위한 여러 치적에도 불구하고 영조는 조상들의 뜻을 이어나가는 계술을 다하지 못한 것에 늘 아쉬워했고, 백성들이 잘사는 민국(民國)을 위해 늘 고뇌했다.
숙종의 적장자로서가 아니라 경종의 아우로서 왕위를 계승한 영조에게 미천한 출신의 어머니 숙빈 최씨는 벗을 수 없는 굴레였다. 경종과 영조의 왕위계승을 둘러싼 당쟁의 격화는 영조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영조로서는 닥쳐오는 왕권의 부정과 도전을 극복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다. 오히려 영조는 효와 우애를 더욱 강하게 주장하고 철저히 실천하는 것으로 당면한 도전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이를 통해 왕권을 굳건히 확립하고 왕실의 안정을 도모하며 출신의 한계를 이겨내고자 한 것이다.
그렇다면 영조는 어떻게 출신의 한계를 극복해 나갔을까? 그중의 하나가 숙빈 최씨의 지위를 높여주는 추숭(追崇)사업이다. 죽은 사람의 지위를 높이는 방법은 왕에게 존호와 시호, 묘호 등을 올리는 것처럼, 만세에 빛날 더욱 훌륭한 이름을 올리는 것이었다. 영조도 “육상궁께 시호를 더 올려서 낳고 길러주신 은혜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고자 한다”고 했다. 따라서 이름 올리기 혹은 이름 바꾸기[易名]는 효의 실천이며, 이름을 명분으로 종법질서의 체계를 바로잡고 왕실의 정통성을 강화하며 질서 및 안정을 도모할 수 있었다.
왕에 즉위하자마자 곧 영조는 숙빈 최씨의 이름 바꾸기에 착수했다. ‘사친이 평소에 소심하고 신중하였다’고 하면서 사친 추숭에 조심스런 태도를 나타낸 영조는 우선 바뀔 이름에 걸맞는 정지작업을 해야 했다. 그리하여 우선 숙빈의 신주를 모실 사당을 건립했다. 숙빈방을 마련하고 경복궁의 서북쪽인 북부 순화방에 사당[숙빈묘]을 세웠다. 그리고는 이후에 간헐적으로 숙빈묘에 가서 술을 한 잔 올리고 배례를 행했다.
그러다가 영조 19년(1743) 무렵부터는 관례를 무시하고 언제든 생각나는 대로 행차하였다. 차츰 사친에 대한 효행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현실에 불만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영조 20년에 못 미친 언제부터인가 매년 다투는 것이 사묘의 친제 두 자였다고 한다. 술 한 잔을 올리는 전배(展拜)만 행할 뿐이지, 술을 세 번 올리는 예를 행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친제를 거행하기 위해서라도 관련 의례를 개정해야 할 뿐 아니라, 이를 정식화할 필요가 있었다.
영조의 관심은 친제를 위한 축문의 강정과 궁호의 사용 문제였다. 신하들은 임금의 뜻이 과할까 염려하여 제동을 걸기도 했지만, 막을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드디어 사당과 무덤에 이름자를 붙여 사당 이름은 육경묘(毓慶廟), 무덤 이름은 소령묘(昭寧墓)로 정했다. 그 후 육경의 ‘경’자와 소령의 ‘녕’자가 자음상동(字音相同)하다고 하여 육상(毓祥)으로 고쳤다. 사당과 무덤의 이름을 가질 수 있는 신분은 세자와 세자빈 이상이었다. 그러나 숙빈 최씨의 사당과 무덤은 아직까지도 그 이름이 격이 낮은 묘(廟)와 묘(墓)에 불과하였으므로 이름을 가졌다고 해서 만족할 영조가 아니었다.
 좌 : 육상묘(毓祥廟) 현액(懸額), 우 : 소령원비(昭寧園碑)
1753년 전격적으로 어머니의 사당과 무덤을 궁원(宮園)으로 승격시키는 한편, 시호를 의논해 확정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때 올린 시호가 화경(和敬)이며, 사당과 무덤은 각각 육상궁과 소령원으로 칭해졌다. 그 후 시호는 세 차례에 걸쳐 더 올려졌다. 영조 31년에 휘덕(徽德), 48년에 안순(安純), 52년에 수복(綏福)을 올렸다. 따라서 숙빈최씨의 명호는 화경휘덕안순수복숙빈최씨(和敬徽德安純綏福淑嬪崔氏)가 되었다.
이와 같이 사당과 무덤의 지위 격상에 따른 칭호와 시호를 올림으로써, 숙빈 최씨의 지위는 그만큼 높아졌다. 당시에는 “그 격이 지나치게 높이 책정되어 능과의 차별성을 두지 않았으니 훗날 분명히 비판을 받게 될 것이다.”라는 혹평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영조가 사친의 궁원을 세자, 세손의 궁원보다 우월한 지위에 두고자 하는 태도를 힐난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 숙빈 최씨의 지위는 왕비와 세자의 중간쯤으로 끌어올려졌다. 차마 왕후로까지 추존하지는 못하였지만, 태묘와 능보다 한 등급 낮은 궁과 원을 칭하고 군모(君母)의 예로 제사를 지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럼으로써 왕의 권위는 효의 전통적 상징성과 함께 더욱 높아졌고, 결국 영조가 왕권 및 국가기강의 확립에 대한 자부심을 갖도록 하기에 이르렀다.
필자: 임민혁(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연구소 연구원)
■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영조․장조문집』,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영조문집보유』,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0.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숙빈최씨자료집』, 2009.
임민혁, 「조선후기 영조의 효제논리와 사친추숭」, 『조선시대사학보』39,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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