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동이’에 나타난 숙종의 모습은 무척이나 행복해 보인다. 장난기 넘친 성격하며, 무엇보다 그의 주변을 둘러싼 여인이 너무 많다. 그리고 ‘그의 여인’들이 낳은 아들 중 2명은 왕의 자리에 올랐다. 경종과 영조가 그들이다. 특히 숙종에게는 정비 인경왕후와 제 1 계비 인현왕후, 제2 계비 인원왕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후궁 출신인 희빈 장씨와 숙빈 최씨의 아들을 연이어 왕위에 올렸다. 당쟁이 가장 격회되었던 시기로 이해되는 숙종 시대에 어떤 과정 속에서 두 후궁의 아들들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을까?
1688년 10월 후궁인 희빈 장씨가 아들을 낳았다. 송시열 등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숙종은 두 달 만에 이 아들을 원자로 정하고, 1690년 세자로 책봉하였다. 인현왕후의 춘추가 아직 젊다는 노론의 주장은 묵살되었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정권을 잡자, 잠시 왕비의 자리에 올랐던 장씨가 빈으로 강등되었다. 1701년 희빈 장씨의 죽음은 세자 경종의 자리를 더욱 위태롭게 했다. 그러나 이미 세자로 책봉된 상황을 번복할 수는 없었다. 장희빈의 죽음에 깊이 관여한 노론에게 왕세자 경종의 존재는 부담스러웠다. 노론은 경종의 대안으로 숙빈 최씨 소생의 왕자 연잉군(후의 영조)을 선택했다. 숙빈 최씨는 인현왕후에 대해 끝까지 의리를 지키면서 장희빈과 대립되었던 인물로 자연스럽게 노론과 연결되었다. 그러나 소론 또한 물러서지 않았다. 이미 정해진 경종의 후계자 계승을 강력히 주장하며 노론에 맞섰다.
1720년 숙종이 승하하자 경종이 소론의 지원 속에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경종이 즉위한 후 노론들은 경종의 건강 문제를 들고 나왔다.‘경종의 건강 상태가 예측할 수 없고 더욱이 후사(後嗣)를 둘 희망이 끊어졌다’며 서둘러 후계자 책봉을 거론했다. 경종은 9세에 단의왕후와 혼인하고 단의왕후의 사망 후, 선의왕후와 혼인했지만 두 사람과의 사이에서 자녀를 한 명도 갖지 못했다. 1721년 8월 사간원 정언 이정소(李廷熽)는 상소를 올려 세제인 연잉군(영조)의 세자 책봉을 건의했다. 당시 모인 대신들은 모두 노론이었고 세제의 세자 책봉을 적극 찬성하였다. 여기에는 노론 김주신의 딸인 대비 인원왕후(仁元王后: 숙종의 제2계비)가 한 몫을 했다. 인원왕후는 ‘효종대왕의 혈맥과 선대왕의 골육으로는 다만 주상(경종)과 연잉군이 있을 뿐이다.“라고 하여 세제인 영조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노론의 압박 속에 1721년 10월 10일 경종은 “내가 이상한 병이 있어 십여 년 이래로 조금도 회복될 기약이 없다.”며, 세제의 대리청정을 명하기까지 하였다. 세제의 대리청정에 대해 소론측은 강하게 반발하였고, 불과 10여일 만에 대리청정의 명이 수차례 번복되었다. 노론측이 주도한 세제의 대리청정은 경종이 노론을 불신하는 계기를 만들었고, 이는 1721년(신축년)과 1722년(임인년)에 결쳐 일어난 신임사화(辛任士禍)라는 ’정치적 광풍‘으로 이어졌다. 소론 강경파 김일경은 세제의 대리청정을 제기한 노론의 4대신, 즉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 등에 대해 경종에 대한 불경, 불충의 죄를 부각시키면서 공격하였다. 노론의 정치적 압박에 휘둘리고 있던 경종도 이제는 소론의 편에 섰다. 김일경의 상소가 기폭제가 되어 노론에 대한 소론의 정치적 보복이 시작되었다. 1722년 3월에는 목호룡이 4대신을 비롯한 노론의 명문자제들이 삼급수(三急手)로 경종을 제거하려 했다는 고변서를 올리면서 노론은 완전히 세력을 잃게 되었다. 노론 4대신은 결국 사약을 받았다. 영조가 즉위 후 노론 4대신을 신원한 것을 보면 자신의 즉위를 위해 희생하였던 노론 4대신을 영조가 끝내 잊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1724년 8월 경종의 병이 위급해졌다. 경종의 식욕을 북돋우기 위해 게장과 생감을 올렸지만 경종은 다음날부터 복통에 시달리다 승하했다. 의가(醫家)에서 꺼리는 게장과 생감을 세제측에서 올려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풍문도 돌았다. 불안하게 세제의 자리를 지키던 영조는 1724년 8월 경종이 승하하자, 노론의 지원 속에 왕위에 올랐다. 이미 세제로 책봉되어 별다른 대안이 없었다.
숙종 사후 왕위 계승에서 경종, 영조로 후궁 소생의 아들이 연이어 즉위하게 된 것은 숙종과 경종이 각각 3명, 2명의 정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서는 왕자가 없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적장자 후계자가 없는 상황에서 각 정치 세력은 당파의 이해관계에 따라 후궁 소생의 왕자를 서로 견제하고 추대한 것이다. 소론은 사사(賜死)된 후궁의 아들이라는 약점이 있었고, 노론은 동생으로서 왕위 계승권자가 되는 왕통상의 약점이 있었으나, 결국 자신들이 지원하는 인물을 왕위에 올리는데 성공했다. 조선후기 정비의 출산율이 현저히 떨어지는 상황과 노론, 소론간의 치열한 당쟁은, 후궁 소생의 왕자가 연이어 즉위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무수리 출신의 후궁 생모, 세제라는 변칙적인 왕위 계승, 소론측의 방해라는 여러 악재 속에서도 영조는 결국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최장수, 장기 집권의 기록을 남기며 조선후기 정치, 문화 중흥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수행하였다. 영조의 성공시대 연출 배경에는 즉위 과정의 난관을 극복한 경험들이 크게 작용했던 것은 아닐까?
필자 : 신병주(건국대학교 사학과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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