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자살
최근 들어 심심치 않게 연예인 자살 사건이 신문 지면을 장식하고 있듯이 자살은 큰 사회 문제의 하나가 아닌가 싶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 조선시대에는 누가 얼마나 자살을 감행했으며,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문헌을 통해서 조선시대에도 자살 사건이 종종 발생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조선시대 자살 통계와 관련해서 참고할 만한 자료 중 하나가 『심리록(審理錄)』이다.
 |
『심리록』은 국왕 정조(正祖)가 심리, 재판한 중죄수 관련 판례를 모은 책자이다. 이 책자에는 정조 재위 기간인 1776년부터 1800년까지의 24년 동안에 발생한 자살 사건 38건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지방 고을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해도 관에 고발하기를 꺼리는데, 이유는 관리들이 검시, 수사하는 과정에서 토색질, 괴롭힘 등으로 고을을 쑥대밭으로 만들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는 살인 사건의 열에 일곱, 여덟 건은 숨긴다고까지 하였다. 정약용의 말은 다소 과장이 섞인 지적이지만, 살인 사건의 경우에도 관에 보고되지 않는 경우가 있었던 것에 비추어보면 당시 자살 사건이 조용히 묻혀 버리는 경우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
[그림1] 『심리록(審理錄)』 |
 |
[그림2] 『흠흠신서(欽欽新書)』 |
자살에 얽힌 사연들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극단적 선택인 자살! 조선시대 자살에 얽힌 사연을 『심리록』을 통해 알아보자. 먼저, 자살자의 성별이다. 『심리록』 수록 자살자의 성별을 분석하면 남성은 7명에 불과하고, 전체 38명 가운데 31명은 여성이다. 여성의 비율이 압도적이었는데, 그만큼 남성에 비해 자신의 목숨을 내던져야 할 절박한 처지에 있었던 여성들이 많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다음, 자살의 원인이다. 남성의 경우 빚 문제 등 생활고로 인해서, 혹은 우발적인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자살을 하는 경우가 있었으나, 여성의 경우는 상당수가 간통, 강간, 추문 등 치정에 얽힌 자살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로써 남녀의 자살 배경이 확연히 구분되고 있다.
남성들의 경우 예를 들어 1782년 강원도 양양 고을의 박성재처럼 고을의 토호 이해인이란 자로부터 도둑으로 의심받아 고문을 당하자 억울함을 참지 못하여, 또한 같은 해 서울 서부의 최성휘처럼 빛 문제로 이웃과 다투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여 스스로 목을 매 자살하였다. 반면 여성 자살은 전체 31명 중 22명이 강간을 당하거나, 간통에 대한 이웃의 추문과 비난을 견디지 못하여 삶을 마감한 경우이다.
예컨대, 1781년 충청도 전의 고을의 서여인은 이웃의 서행진이란 자가 자신의 정조를 더럽히려고 하자 수절하는 반족(班族)인 자신이 상놈에게 욕을 볼 수 없다고 치마끈으로 목을 매 죽었으며, 1787년 경기도 여주 고을의 김씨 딸 판련(判連)은 강취문이란 자가 자신과의 결혼을 목적으로 이미 간통한 사이라고 헛소문을 퍼뜨리자 간수를 마시고 그 날로 죽었다. 이처럼 여성 자살의 경우 대부분 간통, 추문에 대항하여 자신의 결백과 수절을 증명하기 위해 감행한 사건들이었다.
 |
 |
[그림3] 초달태녀(楚橽笞女), |
[그림4]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의 한 장면 |
구한말 화가 김윤보가 그린 『형정도첩(刑政圖帖)』의 한 장면으로 죄지은 여성을 매질하는 장면 |
전쟁으로 훼절의 위험에 처하자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함께 우물로 투신하는 그림. |
물론 여성 자살 사건 중에는 부부갈등이나 가정불화, 순간적인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자살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 시기 여성 자살의 대부분은 자신의 성(性)을 노리는 남성들의 폭력과 시선 때문이었다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여성 자살 사건은 사회와 국가로부터 정절 이데올로기를 강요당하던 당시 취약한 여성의 처지를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그럼 자살의 도구는?
『심리록』 수록 자살사건 38건 가운데 목을 맨 사건은 17건, 음독이 13건이며, 드물게 강물에 투신하거나 칼과 같은 흉기로 자해하는 사례가 집계되었다. 특히 이 시기 자살할 때 마시는 대표적인 독약으로는 ‘간수’가 있었다. 간수는 고염(苦鹽), 또는 노수(滷水)라고도 하는데, 소금을 만들 때 습기가 찬 소금에서 저절로 녹아 흐르는 짜고 쓴 물을 말한다. 두부를 만들 때 응고제로 이용되는 간수는 강한 독성이 있었다. 또한 간수 외에도 사약의 재료인 비소(砒素)를 음독하는 경우도 있었다.
간수든 비소든 먹기는 간단해도 독성은 강렬하였다. 1779년 전라도 함평 고을의 김여인은 김봉기란 자가 자신을 겁탈하려고 하자 그의 어깨를 물어뜯고 가까스로 그 상황을 모면하였는데, 이후 주변의 손가락질을 견디지 못하고 사건 발생 23일 만에 음독자살한 일이 있었다. 『심리록』에는 그녀의 시신을 검시한 내용이 적혀 있는데, 손과 발, 손톱, 발톱이 온통 청흑색(靑黑色)으로 변했으며, 독성으로 인해 혀가 오그라든 처참한 모습이었다.
강요된 자살, 위험에 처한 조선 여성들
성리학적 가치규범이 전사회적으로 확산되는 조선후기에 이르면 여성들은 사회적으로 정절 이데올로기의 내면화, 즉 목숨보다 정절을 중시하는 분위기를 강요받았다. 이런 속에서 『심리록』에 등장하는 일부 여성들은 강요된 자살을 택하기도 하였다.
비뚤어진 정절관념은 여성들을 사지에 몰기까지 하였으니 1794년 전라도 전주 고을의 정여인 자살 사건에서 극명히 알 수 있다. 이 사건은 청상과부 정여인이 다른 남성과 정(情)을 통하여 가문을 더럽혔다는 이유로 친족들로부터 자살을 강요받아 죽은 사건이다. 구체적인 사건 정황은 분명히 알 수 없지만 말이 자살이지 사실상 살인이나 다름이 없었다.
과부가 개가(改嫁)하려는 것이 무슨 큰 죄가 될까 만은 친족들은 이를 묵과할 수 없었다. 정여인의 당숙 정대붕은 정여인이 비상을 마시도록 위협했으며, 숙모 이여인은 독약과 술을 준비하고 사전에 계획을 모의하였다. 심지어 이들은 정여인이 독을 마시고 숨이 끊어지기도 전에 그녀를 땅에 매장해버렸다고 하니, 이쯤 되면 가문을 지키기 위해 과부의 정절 윤리는 더 이상 훼손할 수 없는 지고지선의 가치가 되어버렸다.
이렇듯 조선의 여성들에게 정절은 목숨을 내던져서까지 지켜야할 중대한 가치였다. 아니 정확히는 사회와 국가로부터 그렇게 강요받았음을 『심리록』 속 자살한 여성들은 우리에게 고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필자 : 심재우(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 참고문헌
『심리록(審理錄)』,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 『증수무원록增修無冤錄)』
심재우, 『조선후기 국가권력과 범죄통제-심리록 연구』 태학사, 2009
김 호, 『원통함을 없게 하라-조선의 법의학과 ≪무원록≫의 세계』 프로네시스, 2006
강명관, 『열녀의 탄생-가부장제와 조선 여성의 잔혹한 역사』 돌베개, 2009
심희기,『한국법제사강의』, 삼영사, 199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