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사회는 어느 시대에나 갈등이 있게 마련이다. 조선시대의 경우 지역단위로 향약이나 계와 같은 자치규약이 있었다. 그래서 나라에서는 예치를 표방하고 교화(敎化)를 그들 정치의 이상으로 여겼다. 그러나 교화는 이상이었다. 실제 생활에서는 어느 시대에나 도난과 상해, 살인이 일어나지 않는 곳이 없었다.
- 어린 나이에 시집온 옹기집 딸, 대악지 -
다음은 시집간 지 석 달도 안되어 목을 맨 평민 여인에 관한 서글픈 이야기이다. 사건이 일어난 지역은 경상도 거창이었다. 십대 중반의 이 여인은 시부모의 구박과 남편의 무관심에 삶의 의욕을 잃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사소한 문제로 시어머니가 손찌검을 하자 뒷산에 올라가 소나무에 목을 메어버렸다. 옹기집 딸의 길지 않은 삶, 이 이야기는 증언과 증서, 관청의 조사보고서가 묶여져 한편의 책으로 묶여져있다. 역사의 뒤안길에 잊혀질 이 사건은 1994년 초 한국학중앙연구원 고문서 조사팀에 의해 발굴되, 벽장속에서 걸어 나왔다. 그 기구했던 삶의 현실로 들어가보자.
우리는 100년 전에 일어난 빈번한 일은 잘 모른다. 이른 '예부(預婦)' 역시 그러한 감춰진 사회상이다. 신해년이라는 간지만 나와 있어 이 문서의 정확한 작성 시기는 알 수 없다. 정황으로 보아 1851년 혹은 1791년인 것으로 추측된다. 사건이 일어난 지역은 경상도 거창의 적대(赤大)지역이다. 따라서 사건을 맡은 담당관청은 거창현이었다. 관련자의 심문 부분은 모두 8건이 있으나, 여기서는 검시결과 문안만을 발췌해 소개한다.
신해 6월 초 2일
모든 사람들이 진술(초사)하였다. 동 시신은 그곳에 그대를 두고 회(灰)로써 5곳을 봉하고 답인(踏印)하고는 이에 주위를 봉표(封標)하여 이정(里正:이장) 등에게 인계하여 지키도록 했고, 본 거창현의 운자호(雲字號)의 시장 시체 대장에 3건을 작성해서 1건은 현(縣)에 올리고, 1건은 시친[고발인]에게 주고, 1건은 첨부하여 감영에 올려 보냈다. 이 옥사는 고부간의 다툼에서 비롯되어 인명이 치사(致死)하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그 시친으로서는 반드시 이 부검을 한 연후에 옥사를 행하고자 한 것인즉 목매달아 죽은 것이라도 그 목맨 흔적과 더불어 명확히 하지 않을 수 없다.
동 시체가 매달린 곳에서 그 방으로 옮긴 지가 5일이 되어서 몸 전체가 변색되어 분별하여 검사할 길이 없고 빛에 노출시켜 지게미와 식초로 세척하여 상세히 문질러도 앞·뒷면 여러 곳에 다른 상처나 흔적이 없고, 얼굴 및 우측 무릎 위에 약간 피부가 벗겨진 곳이 있는데 이는 필시 매달을 때 자빠졌기 때문이며, 목숨을 앗아갈 만한 치명적인 상처는 아니고, 단지 목 부위에 부어오른 목맨 자국이 2개 있는데, 하나는 목구멍 위에 있고 하나는 목구멍 밑에 있어서 가운데로 나뉘어 합쳐지지 아니하였고, 좌측 귀로부터 뒤로 우측 귀 뒤까지 가로로 띠가 둘러지고 색깔이 자주 빛으로 뚜렷했다. 혀 쪽으로 똥물이 나오니 이는 필시 스스로 목을 졸라 매달린 흔적이다. 또 참증(參證)한 사람들의 초사에서 모두 소나무에 목을 맨 것이 확실하다고 말하였고, 실제 사인도 스스로 목을 졸라 치사했다고 기록했다.
소위 김조이(조이,召史 평민 천민 여인을 이르는 별칭)는 마을에서는 무식한 여인으로 그 며느리를 박대하여 참을 수 없게 했으며 종종 실로 절통한 바 있어 며느리를 본 지 3개월도 되기 전에 매사를 책망하고 꾸짖으니, 이는 인정상으로 할 수 없는 바이고 27일에 서로 다툴 때도 그 며느리의 순종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순종했든지 어떠했든지 간에 꾸짖고 독려함이 부족하여 분을 못 이겨 구타하여 그 며느리가 나가서 통곡하게 한 그 요망하고 나쁜 정상은 불문가지이다. 한 차례 뺨을 때렸다고 했는데 목격한 두 여자의 초사에는 두 차례 뺨을 때리는 것을 눈으로 보았다고 하니 그 며느리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목을 맨 연유가 이와 같으니 그 죄상을 가히 알 수 있다. 그 며느리 대악지도 상놈들이 말하는 이른바 ‘예부(預婦)’로서 이미 부부의 즐거움이 없었다고 하며 고부간에도 서로 즐거움을 얻지 못하여 종종 비정하게 꾸짖고 책망한즉 그 말로써 조아린 상황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27일 서로 다툴 때 그 시어미가 뺨을 때리고 꾸짖은 것은 극히 요악하며, 비록 상인이나 천인이라도 엄연히 고부간에는 구분이 있는 것인즉 뺨을 맞고 밖으로 나가서 우는 것은 가히 맹랑함이 극에 달한 것이며 끝내 그 분을 참지 못하고 나가서 목을 매고 죽은 것은 그 성품이 흉악하고 맹랑하여 죽음도 족히 애석할 것이 없으니 만약 죽은 자의 죄악을 논할 것 같으면 산자보다 더할 것이며, 피고는 그 시어미가 두 차례 뺨을 때린 것이 비록 반드시 그를 죽이고자 하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 아닌데도 그 며느리가 이로 인해 스스로 목을 매니 만일 치사의 근원을 논해서 우리의 율로서 시행한다면 그 시어머니가 어찌 책임을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이는 비록 용의주도하게 죽인 정범(正犯:주범)과는 차이가 있으나 고발인이 이미 그 시어미를 지적하여 고발했으므로 피고는 김조이로 기록해둔다.
대저 이 옥사는 그 시어미가 범한 것은 뺨을 때린 것에 불과하고 며느리가 죽은 것은 스스로 목을 맨 것이니 옥사가 되지만 형사사건으로서 갈인가건으로는 가히 논할 수 없다.(중략) 김조이의 남편 박상문은 가장으로서 집안을 다스리지 못하고 사람이 목매달아 죽을 지경에까지 이르게 했으니 무죄라고 할 수 없으며, 관련인 등의 사람들은 별로 죄가 될 만한 것이 없으며, 시친 박선봉은 그 여동생이 목매달아 죽었다는 기별을 듣고 그 곡절을 살펴 누일이 경과한 후에 소장을 냈다고 하는바 가히 죄가 될 단서가 없다.
상문의 아들 귀손은 처음 초사에서는 비록 예에 따라 봉초했으나 그 어미가 다투고 뺨을 때렸다는 말을 한 후에는 그 아들을 증인이 되어 어미에게 다시 초사를 받고 그는 봉초하지 않았으며, 박대악지의 목매달아 죽은 기별은 박오십동으로 하여금 알리게 했다한즉, 이치상 마땅히 한번 취조해야 하는데 그가 이미 도망했으므로 취조하지 못하고 상항 피고 김조이를 잡아다 칼을 씌우고 기타 관련된 사람들도 아울러 가두어 처분을 기다릴 것이며, 목을 맨 줄은 이미 매듭을 풀어버렸으므로 턱 주변은 그림으로 그리지 못했고 몸의 앞 뒤 양쪽은 모두 그림으로 그려 올림. 순영에 보고함.
- 여성의 삶과 예부(預婦) -
‘예부(預婦)’란 말 그대로 ‘미리 시집 간 여인’이란 뜻이다. 이 때 ‘미리’라는 뜻은 정식의 혼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먼지 시집에 들어가 사는 경우를 말한다.
여인이 정식 혼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시집가서 산다? 자칫 이해되기 어려운 이 상황은 목숨하나 부지하기 어려운 조선후기 평, 천민들의 생활을 들여다보면 금방 수긍이 된다. 다시 말해 입에 풀칠하기 어려운 친정의 가정형편 때문에 입 하나 줄이자는 차원에서 시집간 신부가 곧 예부였던 것이다. 오늘날 동거하면서도 경제적 형편 때문에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는 경우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친정의 가난함은 시집간 어린 신부에게는 커다란 핸디캡이었다. 반듯한 예물을 마련할 수도 없으려니와 어리다 보니 만사가 서툴게 마련이었다. 이런 사정은 자연히 시집 식구들로부터 무시와 천대를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앞의 사건에서 대악지가 시어머니 ‘김조이’로부터 뺨을 맞은 것도 그래서 나무에 목을 맨 것도 그 근본 원인은 평민 여성의 열악한 경제사정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의 인권이란 그 첫 번째가 ‘굶지 않고 살 수 있는 권리’라고 본다. 굶을 처지에 있는 사람은 자식을 팔아 종으로도 만들 수 있고, 결혼이란 이름으로 팔려가 사실상 시집의 일꾼 노릇을 하기도 된다. 불쌍한 여인 대악지는 실상 시집을 간 것이 아니라 일꾼으로 팔려 간 것이다. 경제적 처지로부터 자유로워 질 때 우리는 그 다음의 인권과 삶을 논할 수 있을 것이다.
(안승준, 한국학중앙연구원 고전자료정보화연구실장)
※위의 안승준의 글(1996)을 개고(改稿)한 것임.
■ 참고문헌
한국고문서학회, 『조선시대 생활사(평민생활사)』 역사비평사, 199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