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외규장각 의궤의 약탈
1866년 프랑스 함대가 조선의 강화도에 쳐들어왔다.(병인양요) 국토를 유린했을 뿐만 아니라 이곳에 있던 최고의 문화재인 외규장각 의궤(儀軌)를 약탈해갔다. ‘의궤’는 의식과 궤범을 뜻하는 용어로 조선시대 왕실 의식의 주요 내용을 기록과 그림으로 정리한 책이다. 의궤는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등에 다수 보관되어 있지만, 파리국립도서관, 일본 궁내청에 보관되어 있던 의궤가 반환의 대상이 되면서 많은 국민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의궤가 강화도에 가게 된 것은 정조의 정치 철학과 깊은 관련이 있다. 1776년 즉위한 정조가 처음 한 일은 창덕궁 내에 학문과 정치의 중심 기구인 규장각을 설립한 것이었다. 이어서 정조는 강화도에 외규장각을 지을 것을 명했다. 역사적 경험상 궁궐 내에 중요 기록물이 보관되어 있는 것이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1782년 외규장각이 세워지면서 이곳은 의궤와 왕실 족보, 어필 등을 보관하는 왕실 기록문화의 보고(寶庫)로 자리를 잡았다. 1784년에 편찬된 『규장각지(奎章閣志)』에 따르면, 외규장각은 6칸 크기의 규모로 행궁(行宮)의 동쪽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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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 「강화부궁전도(江華府宮全圖)」중의
외규장각 부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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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규장각(外奎章閣)이 완성되자 정조는 규장각에 보관하고 있던 어람용 의궤들을 외규장각으로 옮겼고, 이러한 전통은 후대 왕들에 의해서도 계승되었다. 어람용 의궤는 사고나 관련 부서에 보관한 분상용 의궤와는 달리 왕이 친히 열람하기 위해 제작한 의궤였다. 따라서 표지와 장정이 분상용 의궤 보다 화려하고, 종이의 재료도 초주지를 사용하여 분상용 의궤에 비해 질이 좋았다. 어람용 의궤에 수록된 글씨와 그림 또한 분상용 의궤보다 훨씬 우수하다. 같은 의식을 기록한 의궤를 비교해보면 어람용 의궤의 반차도 그림이 훨씬 정밀하다. 글씨 역시 서사관들이 정성을 기울여 쓴 흔적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현재 규장각에 소장된 1857년과 1858년에 작성된 『외규장각형지안(外奎章閣形止案)』』에 따르면 당시 외규장각에는 어람용 의궤류를 비롯하여 총 6,000여 책의 서책이 탁자에 보관되어 있었음이 확인된다. 그러나 근대의 격동기 강화도 외규장각은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니었다. 1866년 프랑스군의 침공으로 외규장각은 철저히 파괴되었다. 프랑스군은 외규장각을 방화하는 만행을 저지르는 가운데에도 의궤만을 따로 뽑아 본국으로 가져갔다. 화려하고 품격이 있는 의궤의 장정과 비단표지, 반차도 등에 매료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때 약탈당한 189종 340여책 중에서, 297책의 의궤는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구관)에 보관되어 있었다.
2. 외규장각 의궤의 이모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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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 ] 외규장각의궤가 보관된 파리국립도서관(구관) 동양관 서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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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파리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의궤는 최근까지 모두 어람용 의궤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2002년 두 차례에 있었던 실사 결과 어람용 의궤 이외에도 분상용 의궤 5종 5책과 등록 1책, 외규장각형지안 2종 2책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외규장각의궤=어람용 의궤라는 공식은 완전하지 않았던 것이다. 실사 결과 대부분 의궤의 비단 표지가 개장된 것도 확인되었다. 원래의 비단 표지 형태를 하고 있는 의궤는 5종 9책에 불과하였으며, 나머지는 표지를 개장하였다. 아마도 강화도에서 운송하는 과정에서 물에 젖었거나, 일부 의궤의 불에 그을린 흔적으로 보아 화재의 여파로 표지를 개장한 것으로 여겨진다.
외규장각 소장 어람용 의궤 중에서 학술적 가치가 보다 큰 의궤도 확인되었다. 국내에 분상용 의궤가 없는 소위 ‘유일본 의궤’이다. 유일본 의궤는 등록을 포함하여 30종이 확인되었다. 유일본 의궤 중 『별삼방의궤』등은 왕실의 열람을 위해 부수를 한정하여 제작했기 때문에 국내의 사고 등에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의궤의 초록 비단 표지의 경우에도 17세기에 제작된 의궤의 표지에는 구름 무늬나 모란 무늬를 사용하다가 후기로 갈수록 무늬가 없는 초록 비단을 사용하고 있음도 나타났다.
어람용 의궤의 실사 결과 정교하게 쓴 글씨, 인물의 수염과 눈매까지 선명하게 그린 그림 등, 원래 비단 표2지 의궤의 경우 품격을 갖춘 표지와 장정 등 그 특징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왜 먼 나라의 이방인이 유독 의궤의 약탈에 집착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3. 145년 만의 귀환
오래도록 잊혀졌던 외규장각 의궤가 다시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1993년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이 프랑스에 보관되어 있는 의궤 중에서 『휘경원원소도감의궤』라는 책을 한국 정부에 반환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한 이후였다. 그러나 2010년까지 17년 이상 지리한 반환 협상은 지속되었다. 2001년에는 외규장각 의궤의 가치와 맞먹는 등가등량(等價等量)의 문화재를 맞교환하는 방식의 환수 방식이 제기되었으나, 국내의 부정적인 여론에 밀려 성사를 보지 못하였다. 이후에도 우리측에서는 ‘영구대여’라는 방식으로 의궤의 반환을 요구했지만 쉽게 합의점을 찾지는 못하였다. 2005년에는 양국 정부가 297책의 의궤 중, 규장각이나 장서각 등 국내에는 소장되지 않는 의궤(유일본의궤) 30책의 디지털화 사업을 추진하였지만 의궤 원본을 확보하지 못한 아쉬움은 여전히 지속되었다. 프랑스측이 무엇보다 한국측에 반환을 꺼린 것은 프랑스가 보유한 약탈문화재가 다수이기 때문이다. 의궤의 반환이 다른 문화재 반환의 선례가 되는 것을 우려하여 프랑스측은 거듭 미온적인 입장을 보인 것이다.
2010년 11월 G20 정상회의 기간 중 프랑스측은 드디어 의궤의 한국 반환에 합의하였다. 그리고 세부 협상으로 2011년 5월말까지 한국에 돌아오는 것이 예정되어 있다. 비록 ‘반환’이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고, 우리측이 시종일관 요구한 ‘영구임대’ 방식에서도 일부 후퇴한 ‘5년마다의 대여’ 방식을 취했지만, 의궤가 145년만에 한국에 돌아온다는 것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이다. 외규장각 의궤의 반환을 계기로 의궤와 조선의 왕실 문화에 대한 연구가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필자 : 신병주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 참고문헌
박병선,「조선조의 의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5.
이태진,『왕조의 유산 - 외규장각 도서를 찾아서』, 지식산업사, 1994.
이태진,「강화도 외규장각 도서의 피탈 경위와 파리 국립도서관 소장 현황」
『외규장각 도서, 무엇이 문제인가?』, 1999.
김문식·신병주 외, 『파리국립도서관 소장 외규장각의궤 조사연구』외교통상부, 2003.
김문식·신병주, 『조선왕실 기록문화의 꽃 의궤』돌베개, 2005.
신병주,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책과 함께, 2007.
박병선, 『병인년, 프랑스가 조선을 침노하다』, 태학사, 2008.
■ 외규장각 의궤의 주요 목록 살펴보기
1) 프랑스에만 있는 유일본 의궤 및 등록(30책)
『풍정도감의궤』, 1630년, coréen2431
『종묘수리도감의궤』, 1637년, coréen2664
『공혜왕후순릉수개도감의궤』, 1648년, coréen2609
『별삼방의궤』, 1661년, coréen2590
『집상전수개의궤』, 1667년, coréen2442
『별삼방의궤』, 1667년, coréen2591
『후릉수개도감의궤』, 1667년, coréen2654
『인선왕후빈전도감의궤(하)』, 1674년, coréen2497
『녹훈도감의궤』, 1680년, coréen2575
『장렬왕후빈전도감의궤』1688년, coréen2502
『장렬왕후혼전도감의궤』1688년, coréen2607
『인조장렬후국장도감의궤(상)』, 1688년, coréen2561
『경덕궁수리소의궤』, 1693년, coréen2551
『복훈도감의궤』, 1694년, coréen2427
『별삼방의궤』, 1722년, coréen2592
『별삼방의궤』, 1726년, coréen2593
『분무녹훈도감의궤』, 1728년, coréen2440
『영릉표석영건청의궤』, 1744년, coréen2519
『제릉신도비영건청의궤』, 1744년, coréen2652
『목릉휘릉혜릉표석영건도감의궤』, 1746년, coréen2574
『효순현빈예장도감의궤(상)』1751년, coréen2443
『효순현빈묘소도감의궤(하)』1751년, coréen2463
『의소세손묘소도감의궤(상)』, 1752년, coréen2512
『의소세손묘소도감의궤(하)』, 1752년, coréen2514
『의소세손예장도감의궤(상)』1752년, coréen2511
『의소세손예장도감의궤(하)』1752년, coréen2513
『휘릉태릉효릉강릉장릉표석영건청의궤』, 1753년, coréen2589
『후릉현릉광릉경릉창릉선릉정릉표석영건청의궤』, 1754년, coréen2441
『순강원상시봉원도감의궤』, 1755년, coréen2424
『문희묘영건청등록』, 1789년, coréen2689
2) 원래의 비단표지가 남아있는 의궤(7종 12책)
『인선왕후국장도감의궤』, 1674년, coréen2553
『인선왕후국장도감의궤』, 1674년, coréen2556
『정종시호도감도청의궤』, 1681년, coréen2510
『인조장렬후사존호존숭도감의궤』, 1686년, coréen2667
『선의왕후혼전도감의궤』, 1730년, coréen2506
『헌종대왕국장도감의궤』, 1849년, coréen2491
『헌종대왕국장도감의궤』, 1894년, coréen2493
『헌종대왕국장도감의궤』, 1849년, coréen2493bis
『헌종대왕국장도감의궤』, 1849년, coréen2494
『헌종경릉산릉도감의궤』, 1849년, coréen2492
『헌종대왕빈전혼전도감의궤』, 1849년, coréen2488
『헌종대왕빈전혼전도감의궤』, 1849년, coréen2489
3) 의궤가 아닌 자료(등록 1책, 형지안 2책)
『문희묘영건청등록』, 1789년, coréen2689
『외규장각형지안』, 1856년, coréen2570
『외규장각형지안』, 1857년, coréen2571
4) 분상용 의궤(5책)
『풍정도감의궤』, 1630년, coréen2431
『공혜왕후순릉수개도감의궤』, 1648년, coréen2609
『장렬왕후빈전혼전도감의궤』, 1688년, coréen2628
『진종세자수책시책례도감의궤』, 1725년, coréen2649
『효순현빈묘소도감의궤』, 1751년, coréen2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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