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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5년만의 귀환, 외규장각] 외규장각의 역사 조회수 : 3710  
 

외규장각(外奎章閣)은 강화도에 있던 왕실 서고이다. 왕실 서고는 국가의 전장 문물을 수장하는 곳이다. 선원록, 어제, 어필, 금보, 옥인, 죽책, 교명, 전장, 고금서적, 문부 등을 수장했다. 왕실의 족보와 국왕의 각종 글과 글씨, 존호와 시호가 새겨진 보인, 책명문, 국가운영을 위한 정법서와 통치서적, 국가행정 관련 문서류, 의궤류 등 그 종류가 다양하다.

이러한 국가 전장 문물을 수장한 곳은 외규장각만이 아니다. 조선시대에는 소위 사대사고(四大史庫)라는 서고가 있었다. 실록의 보관을 목적으로 마련된 사대사고를 정비하여 운영하기 시작한 것은 세종 때이다. 내사고는 춘추관 실록각이며, 외사고는 셋인데 경상도 성주와 전라도 전주, 충청도 충주에 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의 전적만이 안의와 손홍록 등의 노력으로 화를 면한 채, 모두 불타 버리고 말았다. 이 전주사고본이 그 후 모두 강화도로 옮겨졌다.

이렇게 강화도로 옮겨진 실록을 모본으로 실록의 재간행이 이루어졌다. 이를 보관할 장소로는 보다 안전한 지역이 모색되어, 춘추관을 비롯해 강화, 묘향산, 태백산, 오대산으로 결정했다.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는 깊은 산속이나 전략적 요충지로 바꾼 것이다. 이중에서 강화 사고는 강화부 내에 있는 봉선전의 서쪽에 있다가 마니산으로 이건하고 다시 정족산성에 새로 사고를 설치했다.

   
  [그림1 ] 외규장각터(外奎章閣址), 강화 고려궁터  

강화도는 육지와 떨어진 섬으로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구실을 했다. 서울과는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 국왕의 피난처로 이용되기도 했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에 따라, 강화도는 국가의 중요 서적류를 보관하는 장소로 선호되었다. 효종은 마니산사고 옆에 별고(別庫)를 건립하여 교명과 책보, 어제어필, 고금의 서적을 보관하게 했다. 이러한 전통은 영조 때에도 이어져 적고(籍庫)를 두고 영조 잠저시의 서적을 수장하도록 했다.

외규장각은 정조 6년(1782)에 건립되었다. 정조가 외규장각의 건립을 명한 것은 강화도의 지역적 특성과 전통 외에, 각별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할아버지 영조와의 인연에서 비롯되었다.

영조는 20세 때 종부시 도제거라는 직함으로 강화도를 방문했다. 숙종 39년(1713) 늦봄에 봉안사(奉安使)로서 강화에 이르러 선원록을 봉안하고, 초여름에 환궁했다. 돌아오는 뱃전에서 영조는 뜻밖에 숙종의 어제시를 받았다.

 

네가 돌아오는 길이라니 기쁜데 배에서 내렸는가
더디고 더딘 여드레가 일 년이 흐른 듯 하구나
신성의 푸른 들판은 봄빛이 아름다운데
이번 사행을 알고 나서는 기운이 태연하구나

喜爾回來已下船
遲遲八日度如年
新城綠野春光好
應識斯行氣泰然

궁궐로 돌아와 흥정당에서 배사(拜辭)할 때 또 친히 어시를 주었다.

바람이 고요하니 뱃길에 마음이 저절로 편안하고
비가 내린 후 청산에는 붉은 꽃들이 가득하구나
심도에서 이리저리 형승을 관광하고
늦봄을 붙쫓아 돌아와서 아주 좋도다

風靜舟行心自安
紅花雨後滿靑山
沁都歷歷觀形勝
須趂朱明好好還

 

영조는 말년에 늘 이러한 추억에 젖어 생활했다. 숙종에게 효를 다하지 못한 회한이 영조의 마음을 짓눌렀다. 영조는 세손이었던 정조에게 이와 관련한 그들을 써서 보여주고 훈시하는 일에 게으름이 없었다. 정조는 이러한 할아버지의 효성에 감동하고 그 가르침에 충실하고자 노력했다. 강화에 대한 할아버지의 추억은 정조의 눈과 가슴에 깊이 아로새겨졌다. 효제의 도리를 다해야 하는 이유와 왕권과 왕실의 안정이 자신에게 달려있음을 자각했다.

정조는 즉위 초에 발생한 신변의 위협과 갈등을 벗어나 차츰 정치적 안정을 찾으면서 왕권의 강화와 왕실의 번영을 위한 본격적인 행보에 나섰다. 그중의 하나가 외규장각의 건립이었다. 정조는 즉위한 지 5년에, ‘강도에 수장된 열조(列朝)의 선적(璿籍)과 각종 기록들이 호한(浩汗)하여 충동(充棟)이라 들었는데, 이는 전장문자(典章文字)의 많음이 사각(史閣)에 비할 바가 아니고 가히 외규장각이라 할 만하다. 그러니 앞으로는 규장각에서 그 관리를 하라’고 명했다. 강화에는 정족산사고 외에 별고와 적고가 있었으며, 이곳에는 영조의 추억이 서려있었다. 그리하여 정조는 할아버지의 염원을 실현하고자 강화에 규장각의 외각(外閣) 설치를 명한 것이다.

규장각은 정조의 왕권과 왕실의 안정을 책임질 문사들이 포진한 친위 정치기구였다. 그들의 역할 중의 하나는 고금의 도서를 수집하고 정리, 편찬하여 보존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외규장각은 보존도서관으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를 보다 큰 시각에서 보면, 왕조의 운명과 관계가 있다. 이 서적들은 대체로 왕실이나 국가의 통치와 관련된 것들이다. 이것의 편찬과 보존은 왕권과 왕실 나아가서 왕조의 영원성과 번영을 추구하는 일이었다.

정조의 명에 따라 강화유수 서호수는 행궁의 동쪽에 외규장각의 건립을 시작했다. 장녕전의 서쪽에 있는 연초헌을 철거한 자리이다. 약 1년여에 걸친 공사 끝에, 강화유수 김익이 준공을 보고하였다. 이때 건립된 외규장각은 강화부 내의 북쪽에 위치했는데, 그 구조는 정면 6칸이며, 전영 3칸, 동벽문 2칸, 협문 2칸, 정문 2칸, 위장직소(衛將直所) 5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편액은 왕명을 받은 제학 유언호가 ‘外奎章閣’ 네 자를 써서 걸었다.

외규장각의 서적 보관은 이듬해인 정조 6년(1782) 4월 2일부터 시작했다. 별고에 있던 전적과 규장각의 봉모당과 서고(西庫), 강화부의 행궁과 객사, 정족산사고, 책고 등에서 역대 왕의 어제어필 등을 이곳으로 옮기게 하였다. 처음에 옮긴 전적은 762종 4,892책이었다. 그 후 봉안(奉安)과 봉심(奉審), 포쇄(曝曬)가 계속되었고, 병인양요 때까지 수장된 책의 전체 숫자는 1,042종 6,130책으로 추측된다.

고종 3년(1866)에 프랑스군이 침입하자, 강화도가 위급해졌다. 이때 강화유수는 장녕전에 보관해 두었던 어진을 백련사에 이봉할 것을 아뢰었는데, 고종은 남전으로 이봉할 것을 명했다. 그러나 외규장각에 수장된 서적의 이봉은 관련 기사가 보이지 않으며, 외각의 서적은 모두 훼손되었다는 기록만이 있을 뿐이다. 그 해 10월의 2차 침입에서 강화부를 점령한 프랑스군은 장녕전을 비롯하여 모든 관아를 불지르고, 금은보화와 의궤를 비롯한 각종의 전적, 병기 등을 탈취하여 돌아갔다. 외규장각은 이때 소실되고 말았다.


필자 : 임민혁(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 참고문헌
성택경, 「병인양요와 우리의 전적」, 『정신문화연구』 11,1981.
배현숙, 「강도외규장각고」, 『도서관학논집』 6, 1979.
서울대학교 규장각자료센터 홈페이지 : http://e-kyujanggak.snu.ac.kr/center/

 

(이미지 출처 : KBS 다큐멘터리 '역사스페셜' 공식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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