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감록의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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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정감록(필사본). 참설과 풍수지리, 도교가 혼재되어 있는 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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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감록은 조선후기 이래 성행한 대표적인 도참비기(圖讖秘記)로 조선왕조의 멸망, 정씨(鄭氏)왕조의 개창과 계룡산 건도(建都)를 예언하며, 피란지로 십승지(十勝地)를 제시하고 있다. 때로는 유사한 도참비기도 정감록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정감록이라는 명칭이 처음으로 나타나는 것은 영조 15년(1739)이지만, 선조 22년(1589) 정여립 모반사건 관련 실록기사에 “백여 년 전에 민간에 목자망 전읍흥(木字亡 奠邑興)이라는 참언이 있었다.”고 하며, 인조 6년(1628) 발각된 유효립의 역모사건에서도 정씨가 계룡산에 도읍을 세운다는 도참이 나온다. 그러므로 정씨왕조의 개창과 계룡산 건도라는 정치적 예언은 이미 오래 전부터 유행하였고, 영조대에 이르러 여기에 다른 요소가 추가된 비기가 정감록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뒤늦게 피란지 십승지도 정감록의 뒷부분에 덧붙여졌다. 그렇지만 각종 도참비기의 주된 작자들인 ‘실지원국지도(失志怨國之徒)’가 정치사회적 상황과 민심의 흐름에 따라서 예언을 달리하였기 때문에 정감록의 세부적 내용은 항상 동일하게 고정될 수는 없었다. 또한 도참의 신빙성과 신비성을 더하기 위해서 대개 중대한 사건을 파자(破字)나 은유로 집어넣기 때문에 그것으로 제작시기를 추측할 수 있다.
2. 정감록의 구성 요소
정감록의 구성 요소는, ① 정씨의 개국, ② 계룡산 건도, ③ 말세와 병화, ④ 십승지이다.
① 정씨, 또는 정 도령은, 하늘의 명에 따라서 말세에 출현하여 자신들을 구원하고, 이상세계를 세울 초월적인 권능을 지닌 존재로 민중이 오랫동안 믿어온 진인(眞人), 이인(異人), 신인(神人)이었다. 이처럼 정씨가 진인이 된 배경에는 정도전, 정몽주, 정여립 등 정치적 사건에 관련된 정씨들이 있었다. 이들은 실제 정치투쟁에서 패한 인물로서 조선왕조에 반감을 가진 민중의 소원과 분노가 투사된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정감록은 정씨가 이씨에게 복수를 한다는 정치적 예언서이다. 그렇지만 실제 정씨가 누구인지는 해석자나 상황에 따라서 달랐다. 흔히 병란(兵亂)의 주모자는 이 정씨에 가탁하였고, 홍경래와 이필제도 역시 그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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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계룡산 신도안(新都內·신도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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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이성계가 계룡산에 궁궐역을 시작하였으나, 끝내 하륜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후로 계룡산은 한양 대신에 새로운 도읍지가 될 운명을 지녔다고 널리 알려졌다. 여기에 긴박한 정치적 상상을 더한 것은 광해군의 천도 시도였다. 이어 일어난 인조반정과 그에 따른 정치적 격변기에 처음 등장한 정씨의 계룡산 건도설은 왕조교체의 상징으로 확고해졌다. 풍수지리가 종교화한 조선사회에서 명당 계룡산은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일종의 성지였다.
③ 정감록에는 말세(末世)와 병화(兵禍)의 양상이 무섭게 예언되어 있다. 자연현상이 질서를 벗어나고, 폭정이 가해지고, 외적이 쳐들어오며, 기본적 가치와 윤리가 무너진 상태가 되면, 이때가 말세이며 하원갑(下元甲)의 시대이다. 악으로 가득한 현실세계는 이런 말세의 재앙으로 멸망하며, 동시에 새로운 이상세계가 열린다. 따라서 재앙은 민중에게 고통을 주는 악의 무리에 대한 하늘의 징벌이다. 천운의 순환과 종말의 불가피성을 확신하면 할수록, 민중은 구원을 갈망하고 진인의 출현을 고대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정감록은 종교적 종말론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④ 병화를 피할 수 곳이 승지였고, 그 중에서도 10곳이 십승지로 손꼽혔다. 십승지는 본래 임진왜란 같은 외침이 주었던 공포가 만들어낸 피란지였을 것이다. 여기에 말세에 인종(人種)과 곡종(穀種)이 보존될 수 있는 곳이라는 종말적인 관념이 더해진 것이다. 피란지로서 승지의 개념은 정감록의 소극적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감록의 원형인 초기의 ‘감결(鑑訣)’에는 후대의 것과는 달리 십승지는 언급되지 않는다. 지리산 청학동이나 속리산 우복동 같은 승지는 이상향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또한 피란과 면화(免禍)의 원리와 방법으로 “利在松松 利在家家 利在弓弓(이재송송 이재가가 이재궁궁)”을 제시하였다. 다른 도참에는 乙乙까지 추가되었고, 동학(東學)에 이르러는 弓弓乙乙이나 弓乙이라는 주문이 생겼다. 뜻은 풀 수 없지만, 중대한 재액(災厄)에서 인간을 살릴 수 있는 궁극적 구원을 상징하였다.
3. 정감록과 병란(兵亂)
민중은 현실의 고통이 심해질수록 구원자 진인의 출현을 간절히 소망하였다. 진인이 현실세계에 출현하는 시기는 재앙과 병화가 몰아치는 말세였다. 이때를 맞아 소극적인 자들은 병화를 피해서 도망하지만, 천명을 받은 진인의 출현과 그의 권능을 직접 목격하거나 확신하는 사람들은 ‘의병(義兵)’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병란을 일으켰다. 따라서 정치적 야심을 가지고 무장봉기를 획책하던 자들은 정씨 진인으로 자처하며 추종세력을 모아 흔히 병란의 주모자는 이 정씨에 가탁하였다. 민중의 고통이 격심해지고, 정감록과 같은 도참비기가 한층 성행하게 된 18세기 후반 이후에 발생한 병란이나 대중을 동원하려는 역모에는 거의 예외 없이 진인 출현설과 그를 토대로 한 정감록이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고종대 이필제가 도모한 일련의 병란과 동학교도가 동원된 1871년 경상도 영해병란을 들 수 있다.
4. 정감록의 성격
정감록의 기본적 성격은 조선왕조의 멸망과 새로운 왕조의 개창에 관한 정치적 예언서이다. 하늘이 덕이 높은 사람에게 백성을 다스리도록 명령을 내린다는 천명사상으로 왕조교체를 합리화하였던 시대에 나올 수 있던 예언이었다. 반역을 도모하거나 조선왕조를 타도하려는 정치세력이 제작하고 유포시켰기 때문에, 비록 체계적이거나 고차적인 사상은 아니었을지라도, 조선사회에서는 정감록만큼 강력한 현실부정의 상징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후기 많은 모역과 병란에 활용되었고, 심지어 동학농민전쟁에도 그런 양상이 보인다. 그리고 정감록은 민중의 저항적 종교문화에 기초하는 동시에 그것을 강화하였다. 현실세계를 부정하며 이상세계를 간절히 희구하는 민중의 종교적 본성은 진인 출현설을 널리 유포시켰고, 정감록의 정씨가 출현하는 순간, 그것은 생생한 현실이 되었다. 진인 출현설이나 정감록의 미약한 종교성 자체로는 새로운 종교를 탄생시킬 수는 없었지만, 1860년 창도된 동학에는 그 영향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으며, 그 이후 근대 한국의 종교적 열광과도 무관하지는 않았다.
필자 : 장영민(상지대학교 인문사회과학대학 교수)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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