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輸忠定難靖國贊化同德功臣 開府儀同三司 檢校太師守太保 門下侍中判尙書吏禮部事 集賢殿大學士 監修國史 上柱國 致仕 臣 金富軾 奉 ※ 宣撰
雜志 第五 地理三
熊州 本百濟舊都 唐高宗遣蘇定方平之 置熊津都督府 新 ※羅文武王取其地有之 神文王改爲熊川州 置都督 景德王十六年 改名熊州 今公 ※州 領縣二 尼山縣 本百濟熱也山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淸音縣 本百濟伐音支縣 景德王改名 今新豊縣
西原京 神文王五年 初置西原小京 景德王改名西原京 今淸州
大麓郡 本百濟大木岳郡 景德王改名 今木州 領縣二 馴雉縣 本百濟甘買縣 景德王改名 今豊歲縣 金池縣 本百濟仇知縣 景德王改名 今全義縣
嘉林郡 本百濟加林郡 景德王 ※改加爲嘉 今因之 領縣二 馬山縣 本百濟縣 景德王改州郡名及今 並因之 翰山縣 本百濟大山縣 景德王改名 今鴻山縣
西林郡 本百濟舌林郡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二 藍浦縣 本百濟寺浦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庇仁縣 本百濟比衆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伊山郡 本百濟馬尸山郡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二 目牛縣 本百濟牛見縣 景德王改名 今未詳 今武縣 本百濟今勿縣 景德王改名 今德豊縣
槥城郡 本百濟槥郡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三 唐津縣 本百濟伐首只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餘邑縣 本百濟餘村縣 景德王改名 今餘美縣 新平 ※縣 本百濟沙平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扶餘郡 本百濟所夫里郡 唐將蘇定方與庾信平 ※之 文武王十二年置摠管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二 石山縣 本百濟珍惡山縣 景德王改名 今石城縣 悅城縣 本百濟悅己 ※縣 景德王改名 今定山縣
任城郡 本百濟任存城 景德王改名 今大興郡 領縣二 靑正 ※縣 本百濟古良夫里縣 景德王改名 今靑陽縣 孤山縣 本百濟烏山縣 景德王改名 今禮山縣
黃山郡 本百濟黃等也山郡 景德王改名 今連山縣 領縣二 鎭嶺縣 本百濟眞峴縣眞一作貞 景德王改名 今鎭岑縣 珍同縣 本百濟縣 景德王改州郡名及今 並因之
比豐郡 本百濟雨述郡 景德王改名 今懷德郡 領縣二 儒城縣 本百濟奴斯只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赤鳥縣 本百濟所比浦縣 景德王改名 今德津縣
潔城郡 本百濟結已 ※郡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二 新邑縣 本百濟新村縣 景德王改名 今保寧縣 新良縣 本百濟沙尸良縣 景德王改名 今黎陽縣
燕山郡 本百濟一牟山郡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二 燕岐縣 本百濟豆仍只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昧谷縣 本百濟未谷縣 景德王改名 今懷仁縣
富城郡 本百濟基郡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二 蘇泰縣 本百濟省大兮 ※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地育縣 本百濟知六縣 景德王改名 今北谷縣
湯井郡 本百濟郡 文武王十一年唐咸亨二年爲州 置 ※摠管 咸亨十二年 廢州爲郡 景德王因之 今溫水郡 領縣二 陰峯一云陰岑縣 本百濟牙述縣 景德王改名 今牙州
祁 ※梁縣 本百濟屈直縣 景德王改名 今新昌縣
全州 本百濟完山 眞興王十六年爲州 二十六年 州廢 神文王五年 復置完山州 景德王十六年改名 今因之 領縣三 杜城縣 本百濟豆伊縣 景德王改名 今伊城縣 金溝縣 本百濟仇知只山縣 景德王改 ※名 今因之 高山縣 本百濟縣 景德王改州郡名及 今因之
南原小京 本百濟古龍郡 新羅幷之 神文王五年 初置小京 景德王十六年 置南原小京 今南原府
大山郡 本百濟大尸山郡 景德王改名 今泰山郡 領縣三 井邑縣 本百濟井村 景德王改名 今因之 斌城縣 本百濟賓屈縣 景德王改名 今仁義縣 野西縣 本百濟也西伊縣 景德王改名 今巨 ※野縣
古阜郡 本百濟古沙 ※夫里郡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三 扶寧縣 本百濟皆火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喜安縣 本百濟欣良買縣 景德王改名 今保安縣 尙質縣 本百濟上柒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進禮郡 本百濟進仍乙郡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三 伊城縣 本百濟豆尸伊縣 景德王改名 今富利縣 淸渠縣 本百濟勿居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丹川縣 本百濟赤川縣 景德王改名 今朱溪縣
德殷郡 本百濟德近郡 景德王改名 今德恩郡 領縣三 市津縣 本百濟加知奈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礪良縣 本百濟只良肖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雲梯縣 本百濟只伐只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臨陂郡 本百濟屎山郡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三 咸悅縣 本百濟甘勿阿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沃溝縣 本百濟馬西良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澮尾縣 本百濟夫夫里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金堤郡 本百濟碧骨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四 萬頃 ※縣 本百濟豆乃山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平皐縣 本百濟首冬山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利城縣 本百濟乃利阿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武邑縣 本百濟武斤村縣 景德王改名 今富潤縣
淳化郡
淳一作渟 本百濟道實郡 景德王改名 今淳昌縣 領縣二 磧城縣 本百濟礫坪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九皐縣 本百濟堗 ※坪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金馬郡 本百濟金馬渚郡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三 沃野縣 本百濟所力只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野山縣 本百濟閼也山縣 景德王改名 今朗山縣 紆洲縣 本百濟于召渚縣 景德王改名 今紆州
壁谿郡 本百濟伯伊一作海郡 景德王改名 今長溪縣 領縣二 鎭安縣 本百濟難珍阿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高澤縣 本百濟雨坪縣 景德王改名 今長水 ※縣
任實郡 本百濟郡 景德王改州郡名及今 並因之 領縣二 馬靈縣 本百濟馬突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靑雄縣 本百濟居斯勿縣 景德王改名 今巨寧縣
武州 本百濟地 神文王六年 爲武珍州 景德王改爲武州 今光州 領縣三 玄雄縣 本百濟未冬夫里 ※縣 景德王改名 今南平郡 龍山縣 本百濟伏龍縣 景德王改名 今復故
祁 ※陽縣 本百濟屈支縣 景德王改名 今昌平縣
分嶺郡 本百濟分嵯郡 景德王改名 今樂安郡 領縣四 忠烈縣 本百濟助助禮縣 景德王改名 今南陽縣 兆陽縣 本百濟冬老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薑原縣 本百濟豆肹縣 景德王改名 今荳原縣 栢舟縣 本百濟比史縣 景德王改名 今泰江縣
寶城郡 本百濟伏忽郡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四 代勞縣 本百濟馬斯良縣 景德王改名 今會寧縣 季水縣 本百濟季川縣 景德王改名 今長澤縣 烏兒縣 本百濟烏次縣 景德王改名 今定安縣 馬邑縣 本百濟古馬弥 ※知縣 景德王改名 今遂寧縣
秋成郡 本百濟秋子兮郡 景德王改名 今潭陽郡 領縣二
玉 ※菓縣 本百濟菓支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栗原縣 本百濟栗支縣 景德王改名 今原栗縣
靈巖郡 本百濟月奈郡 景德王改名 今因之
潘南郡 本百濟半奈夫里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二 野老縣 本百濟阿老谷縣 景德王改名 今安老縣 昆湄縣 本百濟古彌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岬城郡 本百濟古尸伊縣 景德王改名 今長城郡 領縣二 珍原縣 本百濟丘斯珍兮 ※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森溪縣 本百濟所非兮 ※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武靈郡 本百濟武尸伊郡 景德王改名 今靈光郡 領縣三 長沙縣 本百濟上老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高敞縣 本百濟毛良夫里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茂松縣 本百濟松彌知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昇平郡 本百濟欿 ※
平 ※郡 景德王改名 今因之一云昇州 領縣三 海邑縣 本百濟猿村縣 景德王改名 今麗水縣 晞陽縣 1本百濟馬老縣 景德王改名 今光陽縣 廬山縣 本百濟突山縣 景德王改名 今復故
谷城郡 本百濟欲乃郡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三 富有縣 本百濟遁支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求禮縣 本百濟仇次禮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同福縣 本百濟豆夫只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陵城郡 本百濟尒陵夫里郡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二 富里縣 本百濟波夫里郡 景德王改名 今福城縣 汝湄縣 本百濟仍利阿縣 景德王改名 今和順縣
錦山郡 本百濟發羅郡 景德王改名 今羅州牧 領縣三 會津縣 本百濟豆肹 ※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鐵冶縣 本百濟實於山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艅艎縣 本百濟水川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陽武郡 本百濟道武郡 景德王改名 今道康郡 領縣四 固一作同安縣 本百濟古西伊縣 景德王改名 今竹山縣
耽 ※津縣 本百濟冬音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浸溟縣 本百濟塞琴縣 景德王改名 今海南縣 黃原縣 本百濟黃述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務安郡 本百濟勿阿兮郡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四 咸豊縣 本百濟屈乃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多岐縣 本百濟多只縣 景德王改名 今牟平縣 海際縣 本百濟道際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珍島縣 本百濟因珍島 ※郡 景德王改名 今因之
牢山郡 本百濟徒山縣 景德王改名 今嘉興縣 領縣一 瞻耽 ※縣 本百濟買仇里縣 景德王改名 今臨淮縣
壓海郡 本百濟阿次山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三 碣島縣 本百濟阿老縣 景德王改名 今六昌縣 鹽海縣 本百濟古祿只縣 景德王改名 今臨淄縣 安波縣 本百濟居知山縣居一作屈 景德王改名 今長山縣
[교주:36권1] 輸忠定難靖國贊化同德功臣 開府儀同三司 檢校太師守太保 門下侍中判尙書吏禮部事 集賢殿大學士 監修國史 上柱國 致仕 臣 金富軾 奉
「輸忠定難…金富軾奉」, 原本 缺刻. 本書 目錄에 의거 보충.
[교주:36권2] 新
原本에는 없으나 文意로 보아 추가. 榮·烈 「羅」까지 삭제. 燾 原本과 同.
[교주:36권3] 公
原本 「分」. 高麗史·輿地勝覽에 의거 수정.
[교주:36권4] 王
原本에는 없으나 高麗史·輿地勝覽에 의거 추가.
[교주:36권5] 平
原本 誤刻. 三國史節要·鑄字本에 의거 수정.
[교주:36권6] 平
原本 誤刻. 鑄字本에 의거 수정.
[교주:36권7] 己
原本 「巳」. 世宗實錄地理志에 의거 수정. 鑄字本·高麗史·輿地勝覽 「已」. 朝·權 「巳」, 北 「已」.
[교주:36권8] 正
高麗史·輿地勝覽 「武」.
[교주:36권9] 已
三國史節要 「巳」. 榮·朝·權·燾·浩 「己」.
[교주:36권10] 兮
原本 「号」. 本書 卷37 地理4 및 三國史節要·輿地勝覽에 의거 수정. 鑄字本 「號」. 榮·烈 「號」, 燾 「号(兮)」.
[교주:36권11] 置
原本 「寘」. 高麗史·輿地勝覽에 의거 수정. 「寘」와 「置」는 相通. 榮·烈 「寘」.
[교주:36권12] 祁
三國史節要·高麗史 「祈」. 舜 「祈」.
[교주:36권13] 改
原本 「玫」. 鑄字本에 의거 수정.
[교주:36권14] 巨
原本 「臣」. 高麗史·鑄字本·輿地勝覽에 의거 수정.
[교주:36권15] 沙
原本 「眇」(묘). 本書 卷37 地理4와 三國史節要·高麗史·輿地勝覽에 의거 수정. 榮·朝·北·權·烈·浩 「眇」, 燾 「眇(沙)」, 舜 「沙」.
[교주:36권16] 頃
原本 「項」. 三國史節要·高麗史·鑄字本·輿地勝覽에 의거 수정.
[교주:36권17] 堗
原本 缺刻. 三國史節要·高麗史·輿地勝覽에 의거 보충. 鑄字本 「礫」. 榮·烈 「礫」.
[교주:36권18] 水
原本 「氷」. 高麗史·鑄字本·輿地勝覽에 의거 수정. 朝·權·浩 「氷」, 北 「氷(水)」.
[교주:36권19] 里
原本 誤刻. 三國史節要·鑄字本에 의거 수정.
[교주:36권20] 祁
三國史節要 「祈」. 舜 「祈」.
[교주:36권21] 弥
原本 「㫆」. 「弥」의 訛字이므로 수정. 「弥」와 「彌」는 相通. 鑄字本 「旀」. 本書 卷28 義慈王 20年條, 卷10 憲德王 17年條, 卷37 地理4 百濟條 및 三國史節要·高麗史·輿地勝覽 「彌」. 榮·北·烈 「旀」, 朝·燾 「㫆」, 權·浩 「彌」.
[교주:36권22] 玉
原本 「王」. 三國史節要·高麗史·輿地勝覽에 의거 수정. 朝·權·烈·浩 「王」, 北 「王(玉)」.
[교주:36권23] 兮
原本 「芳」. 本書 卷37 地理4 百濟條 및 高麗史·輿地勝覽에 의거 수정. 榮·朝·權·烈·浩 「芳」.
[교주:36권24] 兮
上同.
[교주:36권25] 欿
原本 誤刻. 高麗史·輿地勝覽에 의거 수정. 朝·烈 「▼(舀+欠)」, 權 「歃」.
[교주:36권26] 平
原本 誤刻. 三國史節要·鑄字本에 의거 수정.
[교주:36권27] 肹
原本 誤刻. 三國史節要·高麗史·輿地勝覽에 의거 수정. 鑄字本 「肣」. 榮·烈 「肣」.
[교주:36권28] 耽
原本 「躭」은 「耽」의 俗字. 高麗史·輿地勝覽 「耽」.
[교주:36권29] 島
原本 「鳥」. 三國史節要·輿地勝覽에 의거 수정. 榮 「鳥」.
[교주:36권30] 耽
原本 「躭」은 「耽」의 俗字. 輿地勝覽 「耽」.
번역문
수충정난정국찬화동덕공신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 수태보 문하시중 판상서이예부사 집현전대학사 감수국사 상주국으로 퇴직한 신하 김부식이 왕명을 받아 편찬하였다.
잡지 제5 지리(地理) 3
웅주(熊州)
※는 본래 백제의 옛 도읍이었다. 당나라 고종(高宗)이 소정방(蘇定方)을 보내 평정하고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설치하였으며, 신라 문무왕이 그 땅을 빼앗아 차지하였다. 신문왕이 웅천주(熊川州) ※로 고치고 도독(都督)을 두었다. 경덕왕 16년(757)에 이름을 웅주(熊州)로 고쳤다. 지금[고려]의 공주(公州) ※이다. 영현(領縣)이 둘이었다.
이산현(尼山縣)
※은 본래 백제 열야산현(熱也山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청음현(淸音縣)
※은 본래 백제 벌음지현(伐音支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신풍현(新豊縣) ※이다.
서원경(西原京)
※은 신문왕 5년(685)에 처음으로 서원소경(西原小京)을 설치한 것이었다. 경덕왕이 이름을 서원경(西原京)으로 고쳤다. 지금[고려]의 청주(淸州) ※이다.
대록군(大麓郡)
※은 본래 백제 대목악군(大木岳郡)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목주(木州) ※이다. 영현이 둘이었다.
순치현(馴雉縣)
※은 본래 백제 감매현(甘買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풍세현(豊歲縣) ※이다.
금지현(金池縣)
※은 본래 백제 구지현(仇知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전의현(全義縣) ※이다.
가림군(嘉林郡)
※은 본래 백제 가림군(加林郡) ※이었는데, 경덕왕이 가(加)를 가(嘉)로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영현이 둘이었다.
마산현(馬山縣)
※은 본래 백제의 현(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주군(州郡)의 이름을 고칠 때 및 지금[고려]까지도 모두 그대로 쓴다.
한산현(翰山縣)
※은 본래 백제 대산현(大山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홍산현(鴻山縣) ※이다.
서림군(西林郡)
※은 본래 백제 설림군(舌林郡)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영현이 둘이었다.
남포현(藍浦縣)
※은 본래 백제 사포현(寺浦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비인현(庇仁縣)
※은 본래 백제 비중현(比衆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이산군(伊山郡)
※은 본래 백제 마시산군(馬尸山郡)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영현이 둘이었다.
목우현(目牛縣)
※은 본래 백제 우견현(牛見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은 어디인지 알 수 없다.
금무현(今武縣)
※은 본래 백제 금물현(今勿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덕풍현(德豊縣) ※이다.
혜성군(槥城郡)
※은 본래 백제 혜군(槥郡)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영현이 셋이었다.
당진현(唐津縣)
※은 본래 백제 벌수지현(伐首只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여읍현(餘邑縣)
※은 본래 백제 여촌현(餘村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여미현(餘美縣) ※이다.
신평현(新平縣)
※은 본래 백제 사평현(沙平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부여군(扶餘郡)
※은 본래 백제 소부리군(所夫里郡) ※이었는데,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과 유신(庾信)이 평정하였다. 문무왕 12년(672)에 총관(摠管)을 두었다.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영현이 둘이었다.
석산현(石山縣)
※은 본래 백제 진악산현(珍惡山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석성현(石城縣) ※이다.
열성현(悅城縣)
※은 본래 백제 열기현(悅己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정산현(定山縣) ※이다.
임성군(任城郡)
※은 본래 백제 임존성(任存城)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대흥군(大興郡) ※이다. 영현이 둘이었다.
청정현(靑正縣)
※은 본래 백제 고량부리현(古良夫里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청양현(靑陽縣) ※이다.
고산현(孤山縣)
※은 본래 백제 오산현(烏山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예산현(禮山縣) ※이다.
황산군(黃山郡)
※은 본래 백제 황등야산군(黃等也山郡)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연산현(連山縣) ※이다. 영현이 둘이었다.
진령현(鎭嶺縣)
※은 본래 백제 진현현(眞峴縣) ※
진(眞)은 정(貞)이라고도 썼다.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진잠현(鎭岑縣) ※이다.
진동현(珍同縣)
※은 본래 백제의 현(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주군(州郡)의 이름을 고칠 때 및 지금[고려]까지도 모두 그대로 쓴다.
비풍군(比豐郡)
※은 본래 백제 우술군(雨述郡)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회덕군(懷德郡) ※이다. 영현이 둘이었다.
유성현(儒城縣)
※은 본래 백제 노사지현(奴斯只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적조현(赤鳥縣)
※은 본래 백제 소비포현(所比浦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덕진현(德津縣) ※이다.
결성군(潔城郡)
※은 본래 백제 결이군(結已郡)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영현이 둘이었다.
신읍현(新邑縣)
※은 본래 백제 신촌현(新村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보령현(保寧縣) ※이다.
신량현(新良縣)
※은 본래 백제 사시량현(沙尸良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여양현(黎陽縣) ※이다.
연산군(燕山郡)
※은 본래 백제 일모산군(一牟山郡)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영현이 둘이었다.
연기현(燕岐縣)
※은 본래 백제 두잉지현(豆仍只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매곡현(昧谷縣)
※은 본래 백제 미곡현(未谷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회인현(懷仁縣) ※이다.
부성군(富城郡)
※은 본래 백제 기군(基郡)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영현이 둘이었다.
소태현(蘇泰縣)
※은 본래 백제 성대혜현(省大兮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지육현(地育縣)
※은 본래 백제 지륙현(知六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북곡현(北谷縣) ※이다.
탕정군(湯井郡)
※은 본래 백제의 군(郡)이었는데, 문무왕 11년, 당나라 함형(咸亨) 2년(671)에 주(州)로 삼고 총관(摠管)을 두었으며, 함형 12년(681)에 주를 폐지하고 군(郡)으로 삼았다. 경덕왕이 [이름을] 그대로 썼다. 지금[고려]의 온수군(溫水郡) ※이다. 영현이 둘이었다.
음봉현(陰峯縣)
※
또는 [음봉(陰峯)을] 음잠(陰岑)이라고도 하였다.은 본래 백제 아술현(牙述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아주(牙州) ※이다.
기량현(祁梁縣)
※은 본래 백제 굴직현(屈直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신창현(新昌縣) ※이다.
전주(全州)
※는 본래 백제 완산(完山) ※이었는데, 진흥왕 16년(555)에 주(州)로 삼았고, 26년(565)에 주를 폐지하였다. 신문왕 5년(685)에 다시 완산주(完山州) ※를 설치하였다. 경덕왕 16년(757)에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영현이 셋이었다.
두성현(杜城縣)
※은 본래 백제 두이현(豆伊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이성현(伊城縣) ※이다.
금구현(金溝縣)
※은 본래 백제 구지지산현(仇知只山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고산현(高山縣)
※은 본래 백제의 현(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주군(州郡)의 이름을 고칠 때 및 지금[고려]까지도 [모두] 그대로 쓴다.
남원소경(南原小京)
※은 본래 백제 고룡군(古龍郡) ※이었는데, 신라가 병합하였다. 신문왕 5년(685)에 처음으로 소경(小京)을 설치하였다. 경덕왕 16년(757)에 남원소경(南原小京)을 설치하였다. 지금[고려]의 남원부(南原府) ※이다.
대산군(大山郡)
※은 본래 백제 대시산군(大尸山郡)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태산군(泰山郡) ※이다. 영현이 셋이었다.
정읍현(井邑縣)
※은 본래 백제 정촌(井村)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빈성현(斌城縣)
※은 본래 백제 빈굴현(賓屈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인의현(仁義縣) ※이다.
야서현(野西縣)
※은 본래 백제 야서이현(也西伊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거야현(巨野縣) ※이다.
고부군(古阜郡)
※은 본래 백제 고사부리군(古沙夫里郡)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영현이 셋이었다.
부령현(扶寧縣)
※은 본래 백제 개화현(皆火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희안현(喜安縣)
※은 본래 백제 흔량매현(欣良買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보안현(保安縣) ※이다.
상질현(尙質縣)
※은 본래 백제 상칠현(上柒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진례군(進禮郡)
※은 본래 백제 진잉을군(進仍乙郡)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영현이 셋이었다.
이성현(伊城縣)
※은 본래 백제 두시이현(豆尸伊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부리현(富利縣) ※이다.
청거현(淸渠縣)
※은 본래 백제 물거현(勿居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단천현(丹川縣)
※은 본래 백제 적천현(赤川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주계현(朱溪縣) ※이다.
덕은군(德殷郡)
※은 본래 백제 덕근군(德近郡)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덕은군(德恩郡) ※이다. 영현이 셋이었다.
시진현(市津縣)
※은 본래 백제 가지나현(加知奈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여량현(礪良縣)
※은 본래 백제 지량초현(只良肖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운제현(雲梯縣)
※은 본래 백제 지벌지현(只伐只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임피군(臨陂郡)
※은 본래 백제 시산군(屎山郡)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영현이 셋이었다.
함열현(咸悅縣)
※은 본래 백제 감물아현(甘勿阿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옥구현(沃溝縣)
※은 본래 백제 마서량현(馬西良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회미현(澮尾縣)
※은 본래 백제 부부리현(夫夫里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김제군(金堤郡)
※은 본래 백제 벽골현(碧骨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영현이 넷이었다.
만경현(萬頃縣)
※은 본래 백제 두내산현(豆乃山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평고현(平皐縣)
※은 본래 백제 수동산현(首冬山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이성현(利城縣)
※은 본래 백제 내리아현(乃利阿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무읍현(武邑縣)
※은 본래 백제 무근촌현(武斤村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부윤현(富潤縣) ※이다.
순화군(淳化郡)
※
순(淳)은 정(渟)이라고도 썼다.은 본래 백제 도실군(道實郡)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순창현(淳昌縣) ※이다. 영현이 둘이었다.
적성현(磧城縣)
※은 본래 백제 역평현(礫坪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구고현(九皐縣)
※은 본래 백제 돌평현(堗坪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금마군(金馬郡)
※은 본래 백제 금마저군(金馬渚郡)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영현이 셋이었다.
옥야현(沃野縣)
※은 본래 백제 소력지현(所力只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야산현(野山縣)
※은 본래 백제 알야산현(閼也山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낭산현(朗山縣) ※이다.
우주현(紆洲縣)
※은 본래 백제 우소저현(于召渚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우주(紆州) ※이다.
벽계군(壁谿郡)
※은 본래 백제 백이군(伯伊郡) ※
[이(伊)는] 해(海)라고도 썼다.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장계현(長溪縣) ※이다. 영현이 둘이었다.
진안현(鎭安縣)
※은 본래 백제 난진아현(難珍阿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고택현(高澤縣)
※은 본래 백제 우평현(雨坪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장수현(長水縣) ※이다.
임실군(任實郡)
※은 본래 백제의 군(郡)이었는데, 경덕왕이 주군(州郡)의 이름을 고칠 때 및 지금[고려]까지도 모두 그대로 쓴다. 영현이 둘이었다.
마령현(馬靈縣)
※은 본래 백제 마돌현(馬突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청웅현(靑雄縣)
※은 본래 백제 거사물현(居斯勿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거령현(居寧縣) ※이다.
무주(武州)
※는 본래 백제의 땅이었는데, 신문왕 6년(686)에 무진주(武珍州) ※로 삼았다. 경덕왕이 무주(武州)로 고쳤다. 지금[고려]의 광주(光州) ※이다. 영현이 셋이었다.
현웅현(玄雄縣)
※은 본래 백제 미동부리현(未冬夫里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남평군(南平郡) ※이다.
용산현(龍山縣)
※은 본래 백제 복룡현(伏龍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은 예전대로 회복하였다.
기양현(祁陽縣)
※은 본래 백제 굴지현(屈支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창평현(昌平縣) ※이다.
분령군(分嶺郡)
※은 본래 백제 분차군(分嵯郡)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낙안군(樂安郡) ※이다. 영현이 넷이었다.
충렬현(忠烈縣)
※은 본래 백제 조조례현(助助禮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남양현(南陽縣) ※이다.
조양현(兆陽縣)
※은 본래 백제 동로현(冬老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강원현(薑原縣)
※은 본래 백제 두힐현(豆肹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두원현(荳原縣) ※이다.
백주현(栢舟縣)
※은 본래 백제 비사현(比史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태강현(泰江縣) ※이다.
보성군(寶城郡)
※은 본래 백제 복홀군(伏忽郡)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영현이 넷이었다.
대로현(代勞縣)
※은 본래 백제 마사량현(馬斯良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회령현(會寧縣) ※이다.
계수현(季水縣)
※은 본래 백제 계천현(季川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장택현(長澤縣) ※이다.
오아현(烏兒縣)
※은 본래 백제 오차현(烏次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정안현(定安縣) ※이다.
마읍현(馬邑縣)
※은 본래 백제 고마미지현(古馬弥知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수령현(遂寧縣) ※이다.
추성군(秋成郡)
※은 본래 백제 추자혜군(秋子兮郡)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담양군(潭陽郡) ※이다. 영현이 둘이었다.
옥과현(玉菓縣)
※은 본래 백제 과지현(菓支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율원현(栗原縣)
※은 본래 백제 율지현(栗支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원율현(原栗縣) ※이다.
영암군(靈巖郡)
※은 본래 백제 월나군(月奈郡)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반남군(潘南郡)
※은 본래 백제 반나부리현(半奈夫里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영현이 둘이었다.
야로현(野老縣)
※은 본래 백제 아로곡현(阿老谷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안로현(安老縣) ※이다.
곤미현(昆湄縣)
※은 본래 백제 고미현(古彌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갑성군(岬城郡)
※은 본래 백제 고시이현(古尸伊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장성군(長城郡) ※이다. 영현이 둘이었다.
진원현(珍原縣)
※은 본래 백제 구사진혜현(丘斯珍兮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삼계현(森溪縣)
※은 본래 백제 소비혜현(所非兮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무령군(武靈郡)
※은 본래 백제 무시이군(武尸伊郡)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영광군(靈光郡) ※이다. 영현이 셋이었다.
장사현(長沙縣)
※은 본래 백제 상로현(上老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고창현(高敞縣)
※은 본래 백제 모량부리현(毛良夫里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무송현(茂松縣)
※은 본래 백제 송미지현(松彌知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승평군(昇平郡)
※은 본래 백제 감평군(欿平郡)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또는 승주(昇州) ※라고도 하였다. 영현이 셋이었다.
해읍현(海邑縣)
※은 본래 백제 원촌현(猿村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여수현(麗水縣) ※이다.
희양현(晞陽縣)
※은 본래 백제 마로현(馬老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광양현(光陽縣) ※이다.
여산현(廬山縣)
※은 본래 백제 돌산현(突山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은 예전대로 회복하였다.
곡성군(谷城郡)
※은 본래 백제 욕내군(欲乃郡)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영현이 셋이었다.
부유현(富有縣)
※은 본래 백제 둔지현(遁支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구례현(求禮縣)
※은 본래 백제 구차례현(仇次禮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동복현(同福縣)
※은 본래 백제 두부지현(豆夫只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능성군(陵城郡)
※은 본래 백제 이릉부리군(尒陵夫里郡)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영현이 둘이었다.
부리현(富里縣)
※은 본래 백제 파부리군(波夫里郡)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복성현(福城縣) ※이다.
여미현(汝湄縣)
※은 본래 백제 잉리아현(仍利阿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화순현(和順縣) ※이다.
금산군(錦山郡)
※은 본래 백제 발라군(發羅郡)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나주목(羅州牧) ※이다. 영현이 셋이었다.
회진현(會津縣)
※은 본래 백제 두힐현(豆肹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철야현(鐵冶縣)
※은 본래 백제 실어산현(實於山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여황현(艅艎縣)
※은 본래 백제 수천현(水川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양무군(陽武郡)
※은 본래 백제 도무군(道武郡)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도강군(道康郡) ※이다. 영현이 넷이었다.
고안현(固安縣)
※
[고(固)는] 동(同)이라고도 썼다.은 본래 백제 고서이현(古西伊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죽산현(竹山縣) ※이다.
탐진현(耽津縣)
※은 본래 백제 동음현(冬音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침명현(浸溟縣)
※은 본래 백제 새금현(塞琴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해남현(海南縣) ※이다.
황원현(黃原縣)
※은 본래 백제 황술현(黃述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무안군(務安郡)
※은 본래 백제 물아혜군(勿阿兮郡)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영현이 넷이었다.
함풍현(咸豊縣)
※은 본래 백제 굴내현(屈乃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다기현(多岐縣)
※은 본래 백제 다지현(多只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모평현(牟平縣) ※이다.
해제현(海際縣)
※은 본래 백제 도제현(道際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진도현(珍島縣)
※은 본래 백제 인진도군(因珍島郡)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뇌산군(牢山郡)
※은 본래 백제 도산현(徒山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가흥현(嘉興縣) ※이다. 영현이 하나였다.
첨탐현(瞻耽縣)
※은 본래 백제 매구리현(買仇里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임회현(臨淮縣) ※이다.
압해군(壓海郡)
※은 본래 백제 아차산현(阿次山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영현이 셋이었다.
갈도현(碣島縣)
※은 본래 백제 아로현(阿老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육창현(六昌縣) ※이다.
염해현(鹽海縣)
※은 본래 백제 고록지현(古祿只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임치현(臨淄縣) ※이다.
안파현(安波縣)
※은 본래 백제 거지산현(居知山縣) ※
거(居)는 굴(屈)이라고도 썼다.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장산현(長山縣) ※이다.
[역주:36권1] 웅주(熊州)
신라 9州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公州市. 고려 太祖가 公州로 이름을 고쳤다.
[역주:36권2] 웅천주(熊川州)
신라 熊州(공주시)의 옛 지명. 다른 기록에는 熊津이라고도 나온다. 본래 백제 熊川이었는데, 文周王 원년(475) 이후 백제의 수도가 되어 固麻城이라고 하였으며, 聖王 16년(538)에 泗沘城으로 천도한 이후에는 5方 중의 하나인 北方 熊津城으로 되었다. 신라와 唐나라의 연합군이 660년에 백제를 멸한 후 唐이 熊津都督府로 삼았는데, 신라가 文武王 11년(671)에 이를 빼앗아 熊川郡으로 삼았다. 神文王 6년(686)에 熊川州를 설치하였다.
[역주:36권3] 공주(公州)
신라 熊州(공주시)의 고려시대 지명. 熊州를 고려 태조가 公州로 이름을 고쳤고, 성종이 牧을 두었다가 다시 節度使를 두고 安節軍으로 칭하였다. 현종이 節度使를 폐지하고 知州事로 낮추었다. 충혜왕이 牧으로 높였다. 조선 인조가 公山縣으로 낮추었다가 얼마 뒤에 다시 높였다. 현종이 縣으로 낮추었고, 숙종이 복구하였다. 영조가 縣으로 낮추었다가 뒤에 복구하였다. 정조가 縣으로 낮추었다가 뒤에 복구하였다. 고종이 郡으로 고쳤다.
[역주:36권4] 이산현(尼山縣)
신라 熊州(공주시)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論山市 魯城面. 고려 현종이 公州의 屬縣으로 삼았으며, 뒤에 監務를 두었다. 조선 태종이 石城(부여군 석성면)과 합하여 尼城縣이라고 하였다가 뒤에 다시 나누어 縣監을 두었다. 인조가 燕山(청원군 문의면)·恩津(논산시 은진면)을 합하여 恩山縣으로 이름을 고쳐서 平川驛 서쪽에 설치하였고, 효종이 각기 복구하였다. 영조가 다시 尼城이라고 칭하였다. 정조가 魯城縣으로 이름을 고쳤고, 고종이 郡으로 고쳤다.
[역주:36권5] 열야산현(熱也山縣)
신라 熊州 尼山縣(논산시 노성면)의 백제 때 지명.
[역주:36권6] 청음현(淸音縣)
신라 熊州(공주시)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公州市 新豊面.
[역주:36권7] 벌음지현(伐音支縣)
신라 熊州 淸音縣(공주시 신풍면)의 백제 때 지명. 다른 기록에는 武夫縣이라고도 나온다. 본서 권37 지리지에 나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따르면 伐音村을 東明州 소속의 富林縣으로 고치려 한 적이 있었다.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있는 伐音城은 이 곳으로 비정된다.
[역주:36권8] 신풍현(新豊縣)
신라 熊州 淸音縣(공주시 신풍면)의 고려시대 지명. 淸音縣을 고려 초에 新豊縣으로 이름을 고쳐서 그대로 公州에 속하게 하였다. 조선도 그대로 두었다.
[역주:36권9] 서원경(西原京)
신라 熊州(공주시)에 속한 小京으로서, 현재의 忠淸北道 淸州市. 본래는 백제 上黨縣(일명 娘臂城, 臂城, 娘子谷)이었다. 다만 본서 신라본기, 고구려본기 및 김유신전 등에서 신라 진평왕 51년(629)에 신라가 빼앗았다는 高句麗 東邊 娘臂城은 현재의 京畿道 抱川郡 郡內面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권8 신라본기에 의하면 신문왕 9년(689)에 西原京城을 쌓았고, 권47 裂起傳에는 軍師 仇近이 元貞公(金庾信의 셋째 아들)을 따라 西原述城을 쌓았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西原述城은 西原京의 山城으로서 청주시 외곽의 石築의 上黨山城을 가리킨다는 견해가 있다(李丙燾, 《國譯 三國史記》, 乙酉文化社, 1977, 695쪽). 뿐만 아니라 娘城 또는 娘臂城은 臥牛山城 즉 牛岩山土城으로 보고, 西原京城 자체를 上黨山城으로 보아 西原述城과 동일시하는 견해도 있다(閔德植, 〈高句麗 道西縣城考〉, 《史學硏究》 36, 1983).
[역주:36권10] 청주(淸州)
신라 熊州 西原京(청주시)의 고려시대 지명. 西原京을 고려 태조가 淸州로 이름을 고쳤다. 성종이 牧을 두었다가 節度使를 두고 全節軍이라 이름하였다. 현종이 安撫使를 폐지하고 牧으로 삼았다. 조선 세종이 觀察使로 하여금 判牧使를 겸임케 하였다가 얼마 안 있어 취소하였다. 효종이 縣으로 낮추었고, 현종이 복구하였다. 숙종이 縣으로 낮추었다가 뒤에 복구하였다. 영조가 縣으로 낮추었다가 뒤에 복구하였다. 정조가 縣으로 낮추었다가 뒤에 복구하였다. 고종이 郡으로 고쳤다.
[역주:36권11] 대록군(大麓郡)
신라 熊州(공주시)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天安市 木川面.
[역주:36권12] 대목악군(大木岳郡)
신라 熊州 大麓郡(천안시 목천면)의 백제 때 지명. 현재의 충남 天安市 木川面 南化里에 백제시대의 토성이 있다(尹武炳, 《木川土城》, 충남대 박물관, 1984).
[역주:36권13] 목주(木州)
신라 熊州 大麓郡(천안시 목천면)의 고려시대 지명. 大麓郡을 고려가 木州로 고쳐서 淸州(청주시)의 屬郡으로 삼았다. 명종이 監務를 두었다. 조선 태종이 木川縣監으로 고쳤다. 고종이 郡으로 고쳤다.
[역주:36권14] 순치현(馴雉縣)
신라 熊州 大麓郡(천안시 목천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天安市 豊歲面.
[역주:36권15] 감매현(甘買縣)
신라 熊州 大麓郡 馴雉縣(천안시 풍세면)의 백제 때 지명. 일명 秭(자)川이라고도 하였다. 다른 기록에는 其買縣, 또는 林川이라고도 나온다.
[역주:36권16] 풍세현(豊歲縣)
신라 熊州 大麓郡 馴雉縣(천안시 풍세면)의 고려시대 지명. 馴雉縣을 고려 초에 豊歲縣으로 이름을 고쳤으며, 현종이 天安府(천안시)의 屬縣으로 삼았다.
[역주:36권17] 금지현(金池縣)
신라 熊州 大麓郡(천안시 목천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燕岐郡 全義面.
[역주:36권18] 구지현(仇知縣)
신라 熊州 大麓郡 金池縣(연기군 전의면)의 백제 때 지명. 본서 권37 지리지에 나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따르면 仇知縣을 東明州 소속의 久遲縣으로 고치려 한 적이 있었다. 현재의 충남 燕岐郡 全義面 邑內里土城은 백제 때의 치소로 추정된다(成周鐸, 〈百濟城址와 文獻資料 -大木岳郡·甘買縣·仇知縣을 중심으로-〉, 《百濟硏究》 17, 1986, 102쪽).
[역주:36권19] 전의현(全義縣)
신라 熊州 大麓郡 金池縣(연기군 전의면)의 고려시대 지명. 金池縣을 고려가 全義縣으로 이름을 고쳐서 淸州의 屬縣으로 삼았다. 조선 태조가 監務를 두었다. 태종이 縣監으로 고쳤으며, 뒤에 燕岐를 합하여 全岐縣이라고 하였다가 각기 복구하였다. 고종이 郡으로 고쳤다.
[역주:36권20] 가림군(嘉林郡)
신라 熊州(공주시)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扶餘郡 林川面. 고려 성종이 林州刺史로 고쳤고, 현종이 嘉林縣令으로 고쳤다. 충숙왕이 知林州事로 높였다. 조선 태조가 府로 높였다. 태종이 복구하였다가 다시 府로 높였으며, 뒤에 도로 복구하고 林川郡으로 이름을 고쳤다.
[역주:36권21] 가림군(加林郡)
신라 熊州 嘉林郡(부여군 임천면)의 백제 때 지명. 加林城은 부여군 임천면 동쪽의 聖興山城으로서 백제 왕도 사비성 남단의 주요 수비성이었다. 그래서 백제 동성왕 때 佐平 苩加의 반란 근거지이기도 하였고, 백제 멸망 이후 부흥군의 근거지이기도 하였으며, 나당 전쟁 당시의 격전지이기도 하였다. 《東國輿地勝覽》 권17 林川郡 城郭條에 聖興山城의 존재가 보이는데 둘레 2,705尺, 높이 13尺의 石築이 있다고 한다. 본서 제사지에 의하면, 신라는 후에 加林城을 小祀의 하나로 삼았는데, 細注에 그 위치가 加林‘縣’으로 된 것은 착오이든지, 아니면 언젠가 그 곳이 郡에서 縣으로 격하된 시기가 있었던 것의 반영인 듯하다.
[역주:36권22] 마산현(馬山縣)
신라 熊州 嘉林郡(부여군 임천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舒川郡 韓山面. 고려도 원래 이름을 그대로 쓰다가 뒤에 韓山縣으로 고쳐서 그대로 嘉林縣의 屬縣으로 삼았다. 명종이 監務를 두고 鴻山(부여군 홍산면)을 겸임케 하였고, 뒤에 知韓州事로 높였다. 조선 태종이 韓山郡으로 고쳤다.
[역주:36권23] 한산현(翰山縣)
신라 熊州 嘉林郡(부여군 임천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扶餘郡 鴻山面.
[역주:36권24] 대산현(大山縣)
신라 熊州 加林郡 翰山縣(부여군 홍산면)의 백제 때 지명.
[역주:36권25] 홍산현(鴻山縣)
신라 熊州 加林郡 翰山縣(부여군 홍산면)의 고려시대 지명. 翰山縣을 고려 초에 鴻山縣으로 이름을 고쳐서 그대로 嘉林縣의 屬縣으로 삼았다. 명종이 韓山(서천군 한산면)監務가 와서 겸임토록 하였다. 조선 태종이 縣監으로 고쳤다. 고종이 郡으로 고쳤다.
[역주:36권26] 서림군(西林郡)
신라 熊州(공주시)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舒川郡 舒川邑. 고려 현종이 嘉林縣(부여군 임천면)의 屬郡으로 삼았으며, 뒤에 監務를 두었다. 충숙왕이 知西州事로 높였다. 조선 태종이 舒川郡으로 이름을 고쳤다.
[역주:36권27] 설림군(舌林郡)
신라 熊州 西林郡(서천군 서천읍)의 백제 때 지명. 다른 기록에는 南陽郡이라고도 나온다. 본서 권6 신라본기 문무왕 3년(663) 11월조에 신라가 백제부흥군의 근거지인 豆陵尹城·周留城 등을 항복시키고 舌利停에 이르러 論功行賞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여기서 舌利停은 곧 舌林郡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데, 細注에 의하면 이를 혹은 后利停으로도 쓴다고 하였다.
[역주:36권28] 남포현(藍浦縣)
신라 熊州 西林郡(서천군 서천읍)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保寧市 藍浦面 陽基里 일대. 고려 현종이 嘉林縣(부여군 임천면)의 屬縣으로 삼았으며, 뒤에 監務를 두었다. 우왕 때 왜구로 인하여 사람들이 사방으로 흩어졌으며, 공양왕이 새로이 鎭城을 설치하고 유망민들을 불러 모았다. 조선 태조가 兵馬使兼判縣事를 두었다. 세조가 鎭을 혁파하고 縣監을 두었다. 고종이 郡으로 고쳤다. 《東國輿地勝覽》에서 藍浦縣 남쪽 15리에 옛 藍浦縣의 터가 있다고 하였으니, 신라 및 고려시대의 藍浦縣址는 현재의 보령시 남포면 陽基里 일대에 해당하는 듯하다.
[역주:36권29] 사포현(寺浦縣)
신라 熊州 西林郡 藍浦縣(보령시 남포면)의 백제 때 지명.
[역주:36권30] 비인현(庇仁縣)
신라 熊州 西林郡(서천군 서천읍)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舒川郡 庇仁面. 고려 현종이 嘉林縣(부여군 임천면)의 屬縣으로 삼았으며, 뒤에 監務를 두었다. 조선 태종이 縣監으로 고쳤다. 고종이 郡으로 고쳤다.
[역주:36권31] 비중현(比衆縣)
신라 熊州 西林郡 庇仁縣(서천군 비인면)의 백제 때 지명. 본서 권37 지리지에 나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따르면 都督府 직속의 賓汶縣으로 고치려 한 적이 있으며, 빈문현은 본래 比勿이었다고 하였으니, 比勿은 比衆의 異稱인 듯하다.
[역주:36권32] 이산군(伊山郡)
신라 熊州(공주시)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禮山郡 德山面. 고려가 洪州(홍성군 홍성읍)의 屬縣으로 삼았으며, 뒤에 監務를 두었다. 조선 태종 5년에 德豊縣과 합하여 德山縣으로 이름을 고치고 同 13년에 縣監으로 삼았다. 그 후 태종 16년에 伊山에 있던 都節制使營을 海美縣으로 옮기고 伊山舊營을 德山縣 治所로 삼았다. 헌종이 郡으로 고쳤다.
[역주:36권33] 마시산군(馬尸山郡)
신라 熊州 伊山郡(예산군 덕산면)의 백제 때 지명.
[역주:36권34] 목우현(目牛縣)
신라 熊州 伊山郡(예산군 덕산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洪城郡 葛山面 雲谷里 일대인 듯. 고려가 高丘縣으로 이름을 고쳤고, 현종이 運州(홍성군 홍성읍)의 屬縣으로 삼았다. 洪州 서쪽 30리에 있었다고 하니, 里數로 따져 보아 현재의 갈산면 운곡리 일대에 해당한다.
[역주:36권35] 우견현(牛見縣)
신라 熊州 伊山郡 目牛縣(홍성군 갈산면)의 백제 때 지명.
[역주:36권36] 금무현(今武縣)
신라 熊州 伊山郡(예산군 덕산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禮山郡 古德面인 듯.
[역주:36권37] 금물현(今勿縣)
신라 熊州 伊山郡 今武縣(예산군 고덕면)의 백제 때 지명. 본서 권37 지리지에 나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따르면 今勿縣을 支潯州 소속의 己汶縣으로 고치려 한 적이 있었다.
[역주:36권38] 덕풍현(德豊縣)
신라 熊州 伊山郡 今武縣(예산군 고덕면)의 고려시대 지명. 今武縣을 고려가 德豊縣으로 이름을 고쳤으며, 현종이 洪州(홍성군 홍성읍)의 屬縣으로 삼았다. 명종이 監務를 두었다. 조선 태종이 伊山縣(예산군 덕산면)과 합쳐 德山縣으로 고쳤다. 德豊縣의 위치는 명확치 않으나, 《東國輿地勝覽》 德山縣 古跡條의 今治 북쪽 13리에 있었다는 『古德山』이 『古德豊』의 誤記라면, 또는 治所를 伊山舊營으로 옮기기 전의 德山治所가 德豊에 있었다면, 고려 德豊縣의 치소 위치는 현재의 禮山郡 古德面에 해당한다.
[역주:36권39] 혜성군(槥城郡)
신라 熊州(공주시)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唐津郡 沔川面. 고려 현종이 運州(홍성읍)의 屬郡으로 삼았으며, 뒤에 監務를 두었다. 충렬왕이 知沔州事로 높였다. 조선 태종이 沔川郡으로 고쳤다.
[역주:36권40] 혜군(槥郡)
신라 熊州 槥城郡(당진군 면천면)의 백제 때 지명.
[역주:36권41] 당진현(唐津縣)
신라 熊州 槥城郡(당진군 면천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唐津郡 唐津邑. 고려 현종이 運州(홍성읍)의 屬縣으로 삼았으며, 예종이 監務를 두었다. 조선 태종이 縣監으로 고쳤다. 고종이 郡으로 고쳤다.
[역주:36권42] 벌수지현(伐首只縣)
신라 熊州 槥城郡 唐津縣(당진군 당진읍)의 백제 때 지명. 다른 기록에는 夫只郡이라고도 나온다. 본서 권37 지리지에 나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따르면 夫首只를 支潯州에 소속된 子來縣으로 고치려고 하였다 하니, 부수지는 벌수지 또는 부지의 다른 호칭인 듯하다.
[역주:36권43] 여읍현(餘邑縣)
신라 熊州 槥城郡(당진군 면천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瑞山市 雲山面 餘美里 일대.
[역주:36권44] 여촌현(餘村縣)
신라 熊州 槥城郡 餘邑縣(서산시 운산면)의 백제 때 지명.
[역주:36권45] 여미현(餘美縣)
신라 熊州 槥城郡 餘邑縣(서산시 운산면)의 고려시대 지명. 餘邑縣을 고려 초에 餘美縣으로 이름을 고쳤고, 현종이 運州(홍성군 홍성읍)의 屬縣으로 삼았다. 예종이 監務를 두었다. 조선 태종이 貞海縣(서산시 해미면)과 합쳐 海美縣으로 이름을 고치면서 貞海를 치소로 삼았다. 《東國輿地勝覽》에서 옛 餘美縣은 海美縣 북쪽 30리에 있었다고 하니, 고려시대 餘美縣의 위치는 瑞山市 雲山面 北端의 餘美里 일대에 해당한다.
[역주:36권46] 신평현(新平縣)
신라 熊州 槥城郡(당진군 면천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唐津郡 新平面. 고려 현종이 運州(홍성읍)의 屬縣으로 삼았다. 洪州 북쪽 90리에 있어서, 沔川郡(당진군 면천면) 東村을 넘어서 들어간다고 하니, 현재의 당진군 신평면에 해당한다.
[역주:36권47] 사평현(沙平縣)
신라 熊州 槥城郡 新平縣(당진군 신평면)의 백제 때 지명. 다만 권6 문무왕 3년(663) 2월조에 居勿城과 같이 聯稱되는 沙平城은 다른 곳을 가리킨다.
[역주:36권48] 부여군(扶餘郡)
신라 熊州(공주시)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扶餘郡 扶餘邑. 고려 현종이 公州의 屬郡으로 삼았다. 명종이 監務를 두었다. 조선 태종이 縣監으로 고쳤다. 고종이 郡으로 고쳤다.
[역주:36권49] 소부리군(所夫里郡)
신라 熊州 扶餘郡(부여군 부여읍)의 백제 때 지명. 다른 기록에는 泗沘라고도 나온다. 본래는 백제 所夫里郡이었는데, 16년(538) 봄에 수도를 熊津에서 泗沘 즉 所夫里로 옮기고 南扶餘라고 칭하였다. 나당 연합군이 이를 함락시켰고, 신라 문무왕 11년(671)에 泗沘州(또는 所夫里州)를 설치하였다. 신문왕 6년(686)에 郡으로 고쳤다.
[역주:36권50] 석산현(石山縣)
신라 熊州 扶餘郡(부여군 부여읍)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扶餘郡 石城面. 본서 권7 신라본기 문무왕 11년(671) 6월조에 신라장군 竹旨 등이 加林城의 禾穀을 짓밟고 唐兵과 石城에서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고 하였는바, 여기서의 石城은 石山縣을 가리키는 듯하다.
[역주:36권51] 진악산현(珍惡山縣)
신라 熊州 扶餘郡 石山縣(부여군 석성면)의 백제 때 지명.
[역주:36권52] 석성현(石城縣)
신라 熊州 扶餘郡 石山縣(부여군 석성면)의 고려시대 지명. 石山縣을 고려 초에 石城縣으로 이름을 고쳤으며, 현종이 公州(공주시)의 屬縣으로 삼았다. 명종이 監務를 두었다가 뒤에 취소하였다. 공민왕이 扶餘監務가 와서 겸임케 하였고, 공양왕이 다시 監務를 두었다. 조선 태종이 尼山(논산시 노성면)과 합쳐서 尼城이라고 하였다가, 뒤에 다시 나누어 縣監으로 삼았다. 고종이 郡으로 고쳤다.
[역주:36권53] 열성현(悅城縣)
신라 熊州 扶餘郡(부여군 부여읍)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靑陽郡 定山面.
[역주:36권54] 열기현(悅己縣)
신라 熊州 扶餘郡 悅城縣(청양군 정산면)의 백제 때 지명. 다른 기록에는 豆良尹城, 豆陵尹城 또는 豆串城 또는 尹城이라고도 나온다. 본서 권37 지리지에 나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따르면 이 곳을 都督府 직속의 尹城縣이라고 고치려 한 적이 있었다. 다만 본서 신라본기 무열왕 8년조의 豆良尹城=豆良伊城을 현재의 錦山郡 富利面으로 보고 문무왕 3년조의 豆陵尹城=豆良尹城을 舒川郡 麒山面 永慕里山城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李丙燾, 《國譯 三國史記》, 乙酉文化社, 1977), 근거가 분명치 않다.
[역주:36권55] 정산현(定山縣)
신라 熊州 扶餘郡 悅城縣(청양군 정산면)의 고려시대 지명. 悅城縣을 고려 초에 定山縣으로 이름을 고쳤다. 현종이 公州(공주시)의 屬縣으로 삼았고, 뒤에 監務를 두었다. 조선 태종이 縣監으로 고쳤다. 고종이 郡으로 고쳤다.
[역주:36권56] 임성군(任城郡)
신라 熊州(공주시)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禮山郡 大興面.
[역주:36권57] 임존성(任存城)
신라 熊州 任城郡(예산군 대흥면)의 백제 때 지명. 다른 기록에는 今州라고도 나온다.
[역주:36권58] 대흥군(大興郡)
신라 熊州 任城郡(예산군 대흥면)의 고려시대 지명. 任城郡을 고려 초에 大興郡으로 고쳤고, 현종이 運州(홍성읍)의 屬郡으로 삼았다. 명종이 監務를 두었다. 조선 태종이 縣監으로 고쳤다. 숙종이 郡으로 고쳤다.
[역주:36권59] 청정현(靑正縣)
신라 熊州 任城郡(예산군 대흥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靑陽郡 靑陽邑. 中宗壬申刊本 《삼국사기》와 《三國史節要》에는 靑正縣으로 되어 있으나, 《高麗史》 地理志와 《東國輿地勝覽》에는 靑武縣이라고 하였으니, 본서의 ‘正’字는 ‘武’에 대한 避諱 缺筆字를 오인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
[역주:36권60] 고량부리현(古良夫里縣)
신라 熊州 任城郡 靑正縣(청양군 청양읍)의 백제 때 지명. 본서 권37 지리지에 나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의하면 이를 都督府 직속의 麟德縣으로 고치려 한 적이 있었다.
[역주:36권61] 청양현(靑陽縣)
신라 熊州 任城郡 靑正縣(청양군 청양읍)의 고려시대 지명. 靑正縣을 고려 초에 靑陽縣으로 고쳤다. 현종이 天安府의 屬縣으로 삼았고, 뒤에 洪州(홍성군 홍성읍)에 이속시켰다. 조선 태조가 監務를 두었고, 태종이 縣監으로 고쳤다. 현종이 定山(청양군 정산면)에 넣었다가 뒤에 다시 떼어 縣을 설치하였다. 고종이 郡으로 고쳤다.
[역주:36권62] 고산현(孤山縣)
신라 熊州 任城郡(예산군 대흥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禮山郡 禮山邑. 본서 권8 신라본기 신문왕 6년(686) 2월조에 石山(부여군 석성면), 馬山(서천군 한산면), 孤山, 沙平(당진군 신평면)의 4縣을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있어서, 경덕왕이 孤山縣으로 이름을 고쳤다는 지리지의 기록과 어긋난다.
[역주:36권63] 오산현(烏山縣)
신라 熊州 任城郡 孤山縣(예산군 예산읍)의 백제 때 지명. 본서 권37 지리지에 나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따르면 孤山을 支潯州 소속의 馬津縣으로 고친 적이 있었다. 다만 마진현의 본래 지명이 孤山이었다는 것으로 보아, 고산은 烏山의 異稱으로 쓰이기도 한 듯하다. 또한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흥왕 9년 2월조의 百濟獨山城이나 《日本書紀》 권19 欽明紀 9년 4월조의 馬津城은 모두 이 곳의 異稱이다.
[역주:36권64] 예산현(禮山縣)
신라 熊州 任城郡 孤山縣(예산군 예산읍)의 고려시대 지명. 孤山縣을 고려 태조가 禮山縣으로 이름을 고쳤다. 현종이 天安府의 屬縣으로 삼았고, 뒤에 監務를 두었다. 조선 태종이 縣監으로 고쳤다. 고종이 郡으로 고쳤다.
[역주:36권65] 황산군(黃山郡)
신라 熊州(공주시)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論山市 連山面.
[역주:36권66] 황등야산군(黃等也山郡)
신라 熊州 黃山郡(논산시 연산면)의 백제 때 지명. 본서 권5 무열왕 7년(660) 10월 9일조에 왕이 太子와 諸軍을 거느리고 尒禮城을 쳐서 함락시키니 백제의 20여 城이 다 항복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尒禮城은 이 근처에 비정된다.
[역주:36권67] 연산현(連山縣)
신라 熊州 黃山郡(논산시 연산면)의 고려시대 지명. 黃山郡을 고려 초에 連山郡으로 고쳤다. 현종이 公州의 屬郡으로 삼았고, 뒤에 監務를 두었다. 조선 태종이 縣監으로 고쳤다. 인조가 尼城(논산시 노성면)·恩津(논산시 은진면)과 합하여 한 縣으로 만들었다가 뒤에 다시 나누어 縣을 설치하였다. 고종이 郡으로 고쳤다.
[역주:36권68] 진령현(鎭嶺縣)
신라 熊州 黃山郡(논산시 연산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大田廣域市 儒城區 南端 校村洞 일대.
[역주:36권69] 진현현(眞峴縣)
신라 熊州 黃山郡 鎭嶺縣(대전광역시 유성구 남단)의 백제 때 지명. 다른 기록에는 貞峴縣이라고도 나온다.
[역주:36권70] 진잠현(鎭岑縣)
신라 熊州 黃山郡 鎭嶺縣(대전광역시 유성구 남단)의 고려시대 지명. 鎭嶺縣을 고려 초에 鎭岑縣으로 고쳤다. 현종이 公州(공주시)의 屬縣으로 삼았고, 뒤에 監務를 두었다. 조선 태종이 縣監으로 고쳤다. 고종이 郡으로 고쳤다. 《東國輿地勝覽》 鎭岑縣條에 龍頭川이 縣北 3리에 있고 鄕校가 縣 남쪽 2리에 있다고 하였으니, 현재의 大田廣域市 儒城區 南端의 校村洞, 大井洞, 龍溪洞 일대(舊 大德郡 鎭岑面)에 해당한다.
[역주:36권71] 진동현(珍同縣)
신라 熊州 黃山郡(논산시 연산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錦山郡 珍山面. 다른 기록에는 珍洞縣이라고도 나온다. 고려가 이름을 그대로 두고 進禮縣(금산군 금산읍)의 屬縣으로 삼았다. 공양왕이 高山(완주군 고산면)監務가 겸임토록 하였다. 조선 태조가 知珍州事로 높였고, 태종이 珍山郡으로 이름을 고쳤다.
[역주:36권72] 비풍군(比豐郡)
신라 熊州(공주시)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大田廣域市 大德區 懷德驛 남쪽 邑內洞 일대.
[역주:36권73] 우술군(雨述郡)
신라 熊州 比豐郡(대전광역시 대덕구)의 백제 때 지명. 다른 기록에는 朽淺이라고도 나온다.
[역주:36권74] 회덕군(懷德郡)
신라 熊州 比豐郡(대전광역시 대덕구)의 고려시대 지명. 고려 초에 懷德郡으로 이름을 고쳤고, 현종이 公州의 屬郡으로 삼았다. 명종이 監務를 두었다. 조선 태종이 縣監으로 고쳤다. 고종이 郡으로 고쳤다. 《東國輿地勝覽》 懷德縣 山川條에 迭峴 즉 현재의 절고개가 縣東 13리에 있다고 하였으니, 懷德郡의 위치는 현재의 大田廣域市 大德區 懷德驛 남쪽 邑內洞, 宋村洞 일대에 해당한다.
[역주:36권75] 유성현(儒城縣)
신라 熊州 比豐郡(대전광역시 대덕구)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大田廣域市 儒城區 溫泉洞 일대. 고려가 公州(공주시)의 屬縣으로 삼았다. 조선이 그대로 두었다. 《東國輿地勝覽》에 儒城縣은 公州 동쪽 54리에 있었으나, 옛 儒城은 儒城縣 동쪽 4리 廣道院 옆에 있어서, 客舍, 鄕校, 倉庫의 基址가 아직 남아 있다고 하였으니, 옛 儒城은 곧 현재의 대전광역시 유성구 溫泉洞 일대에 해당한다.
[역주:36권76] 노사지현(奴斯只縣)
신라 熊州 比豐郡 儒城縣(대전광역시 유성구 온천동)의 백제 때 지명. 다른 기록에는 奴叱只縣이라고도 나온다. 본서 권6 신라본기 문무왕 2년(662) 8월조에 內斯只城이라고 나온다.
[역주:36권77] 적조현(赤鳥縣)
신라 熊州 比豐郡(대전광역시 대덕구)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燕岐郡 錦南面 柑城里 일대.
[역주:36권78] 소비포현(所比浦縣)
신라 熊州 比豐郡 赤鳥縣(연기군 금남면)의 백제 때 지명.
[역주:36권79] 덕진현(德津縣)
신라 熊州 比豐郡 赤鳥縣(연기군 금남면)의 고려시대 지명. 赤鳥縣을 고려가 德津縣으로 이름을 고치고 公州(공주시)의 屬縣으로 삼았다. 조선이 그대로 두었다. 公州 동쪽 50리에 있었다는 《東國輿地勝覽》의 기록 및 《大東輿地圖》와 비교해 볼 때, 현재의 燕岐郡 錦南面 柑城里 일대에 해당한다.
[역주:36권80] 결성군(潔城郡)
신라 熊州(공주시)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洪城郡 結城面. 고려 현종이 運州(홍성읍)의 屬郡으로 삼았으며, 명종이 結城郡으로 이름을 고치고 監務를 두었다. 조선 태종이 縣監으로 고쳤다. 영조가 保寧(보령시 주포면)에 넣었다가 뒤에 복구하여 縣으로 삼았다. 고종이 郡으로 고쳤다.
[역주:36권81] 결이군(結已郡)
신라 熊州 潔城郡(홍성군 결성면)의 백제 때 지명.
[역주:36권82] 신읍현(新邑縣)
신라 熊州 潔城郡(홍성군 결성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保寧市 周浦面 保寧里(面所) 일대.
[역주:36권83] 신촌현(新村縣)
신라 熊州 潔城郡 新邑縣(보령시 주포면)의 백제 때 지명. 다른 기록에는 沙村이라고도 나온다. 본서 권37 지리지에 나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따르면 이 곳을 都督府 직속의 散昆縣으로 고치려 한 적이 있었다. 신촌현의 治所로는 현재의 충남 保寧市 周浦面 鳳堂里 鳳堂城(=古南山城)과 주포면 保寧里(面所) 동쪽 鎭堂山에 있는 唐山城이 비정 가능하되, 6세기 전반까지는 봉당산성이었다가, 그 이후에는 당산성으로 옮겼으리라는 견해가 있다(成周鐸, 〈百濟 新村縣 治所의 位置 比定에 관한 硏究〉, 《百濟論叢》 1, 1985, 145쪽).
[역주:36권84] 보령현(保寧縣)
신라 熊州 潔城郡 新邑縣(보령시 주포면)의 고려시대 지명. 新邑縣을 고려 초에 保寧縣으로 이름을 고쳤으며, 현종이 運州(홍성읍)의 屬縣으로 삼았다. 예종이 監務를 두었다. 조선 태종이 縣監으로 고쳤다. 효종이 府로 높였다가 뒤에 다시 縣으로 낮추었다. 고종이 郡으로 고쳤다. 《東國輿地勝覽》 保寧縣 山川條에 地乙峴 즉 질고개가 縣東 5리에 있고 大川이 縣南 24리에 있다고 하였으니, 조선시대의 保寧縣 治所는 현재의 保寧市 周浦面 保寧里(面所) 保寧邑城에 해당한다.
[역주:36권85] 신량현(新良縣)
신라 熊州 潔城郡(홍성군 결성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洪城郡 長谷面 廣城里 일대.
[역주:36권86] 사시량현(沙尸良縣)
신라 熊州 潔城郡 新良縣(홍성군 장곡면)의 백제 때 지명. 다른 기록에는 沙羅라고도 나온다. 본서 권3 신라본기 慈悲麻立干 17년(474)조에 沙尸城 축성 기사가 나오고, 권6 신라본기 문무왕 원년(661) 9월조에 沙尸山郡太守 哲川 등이 나오는데, 그 沙尸城 및 沙尸山郡과 같은 곳을 가리키는지는 알 수 없다.
[역주:36권87] 여양현(黎陽縣)
신라 熊州 潔城郡 新良縣(홍성군 장곡면)의 고려시대 지명. 고려가 黎陽縣으로 고치고 監務를 두었다. 현종이 運州(홍성군 홍성읍)의 屬縣으로 삼았으며, 洪州 남쪽 37리에 있었다. 《大東輿地圖》와 비교해 볼 때, 현재의 洪城郡 長谷面 廣城里에 해당한다.
[역주:36권88] 연산군(燕山郡)
신라 熊州(공주시)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北道 淸原郡 文義面. 고려가 淸州의 屬郡으로 삼았고, 명종이 監務를 두었다. 고종이 文義로 이름을 고치고 縣令으로 높였다. 충렬왕이 嘉林(부여군 임천면)에 병합시켰다가 얼마 뒤에 복구하였다. 조선 선조가 淸州에 병합시켰고, 광해군이 다시 縣을 설치하였다. 고종이 淸州에 병합시켰다가 다시 복구하였고, 뒤에 郡으로 고쳤다. 현재의 청원군 문의면 文山里 일대에 해당한다.
[역주:36권89] 일모산군(一牟山郡)
신라 熊州 燕山郡(청원군 문의면)의 백제 때 지명.
[역주:36권90] 연기현(燕岐縣)
신라 熊州 燕山郡(청원군 문의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燕岐郡 南面 燕岐里 일대. 고려 현종이 淸州(청주시)의 屬縣으로 삼았다. 명종이 監務를 두었고, 뒤에 木州(천안시 목천면)監務가 와서 겸임토록 하였다. 조선 태종이 나누어 監務를 두었고, 뒤에 全義(연기군 전의면)에 병합시켜 全岐라고 칭하였다가 다시 나누어 縣監을 두었다. 숙종이 文義(청원군 문의면)에 병합시켰다가 다시 縣으로 삼았다. 고종이 郡으로 고쳤다.
[역주:36권91] 두잉지현(豆仍只縣)
신라 熊州 燕山郡 燕岐縣(연기군 남면)의 백제 때 지명.
[역주:36권92] 매곡현(昧谷縣)
신라 熊州 燕山郡(청원군 문의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北道 報恩郡 懷北面.
[역주:36권93] 미곡현(未谷縣)
신라 熊州 燕山郡 昧谷縣(보은군 회북면)의 백제 때 지명. 《世宗實錄》 권149 地理志 懷仁條에 未谷城이 나오고, 《東國輿地勝覽》 권16 懷仁縣條에는 昧谷山이 縣 동쪽 1리에 있고 昧谷山城은 석축으로서 1,152尺이었다고 나온다. 현재의 위치는 報恩郡 懷北面 富壽里이며, 지표로부터 70미터 정도(해발 187미터)의 독립구릉에 1차 축조의 土石城 300미터, 2차 증축의 石城 6∼700미터의 규모이며, 군데군데 석축이 남아 있고 그 안에서 백제 토기와 고신라 토기편이 발견되었다(成周鐸·車勇杰, 〈百濟未谷縣과 昧谷山城의 歷史地理的 管見〉, 《三佛金元龍敎授停年退任紀念論叢Ⅱ》, 1987, 597∼610쪽 참조).
[역주:36권94] 회인현(懷仁縣)
신라 熊州 燕山郡 昧谷縣(보은군 회북면)의 고려시대 지명. 昧谷縣을 고려 초에 懷仁縣으로 이름을 고쳤고, 현종이 淸州(청주시)의 屬縣으로 삼았다. 뒤에 懷德(대전광역시 대덕구)兼任官으로 삼았다. 우왕이 따로 監務를 두었다. 조선 태종이 縣監으로 삼았다. 고종이 郡으로 고쳤다.
[역주:36권95] 부성군(富城郡)
신라 熊州(공주시)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瑞山市. 고려 인종이 縣令으로 고쳤으며, 명종이 官號를 없앴다. 충렬왕이 瑞山으로 이름을 고치고 知郡事로 높였다가 뒤에 瑞州牧으로 높였다. 충선왕이 瑞寧府로 낮추었고 뒤에 또 知瑞州事로 낮추었다. 조선 태종이 다시 瑞山郡으로 고쳤다. 숙종이 縣으로 낮추었다가 다시 복구하였다. 영조가 縣으로 낮추었다가 다시 복구하였다. 정조가 縣으로 낮추었다가 다시 복구하였다.
[역주:36권96] 기군(基郡)
신라 熊州 富城郡(서산시)의 백제 때 지명.
[역주:36권97] 소태현(蘇泰縣)
신라 熊州 富城郡(서산시)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泰安郡 泰安邑. 고려 현종이 運州(홍성군 홍성읍)의 屬縣으로 삼았다. 충렬왕이 泰安으로 이름을 고치고 知郡事로 높였다. 조선이 그대로 두었다. 본서 신라본기 애장왕 8년(804)조에 蘇大縣이라고 나온다.
[역주:36권98] 성대혜현(省大兮縣)
신라 熊州 富城郡 蘇泰縣(태안군 태안읍)의 백제 때 지명.
[역주:36권99] 지육현(地育縣)
신라 熊州 富城郡(서산시)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瑞山市 地谷面.
[역주:36권100] 지륙현(知六縣)
신라 熊州 富城郡 地育縣(서산시 지곡면)의 백제 때 지명. 본서 권37 지리지에 나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따르면 知留를 都督府 支潯州 소속의 平夷縣으로 고치려 한 적이 있었으니, 知留는 곧 知六縣을 가리키는 듯하다.
[역주:36권101] 북곡현(北谷縣)
신라 熊州 富城郡 地育縣(서산시 지곡면)의 고려시대 지명. 다른 기록에는 地谷縣이라고 나온다. 고려가 地谷縣(또는 北谷縣)으로 이름을 고쳐서 그대로 富城郡(서산시)에 속하게 두었다. 조선이 그대로 두었다.
[역주:36권102] 탕정군(湯井郡)
신라 熊州(공주시)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牙山市(舊 溫陽市). 현재의 아산시 중심가에서 동남쪽으로 2 km 떨어진 읍내동에는 조선시대의 溫陽鄕校와 溫州衙門이 있고, 읍내동 뒷산의 산성에서는 백제시대의 瓦片이나 토기편이 상당량 수습되었으므로, 湯井城은 아산시 邑內洞山城에 비정된다(兪元載, 〈百濟 湯井城 硏究〉, 《百濟論叢》 3, 百濟文化開發硏究院, 1992, 67∼68쪽 참조).
[역주:36권103] 온수군(溫水郡)
신라 熊州 湯井郡(아산시)의 고려시대 지명. 湯井郡을 고려 초에 溫水郡으로 이름을 고쳤으며, 현종이 天安府의 屬郡으로 삼았다. 명종이 監務를 두었다. 조선 태종이 新昌에 합쳐서 溫昌으로 이름을 고쳤다가, 뒤에 나누어 溫水縣을 설치하였다. 세종이 온천에 가서 溫陽으로 이름을 고치고 郡으로 높였다.
[역주:36권104] 음봉현(陰峯縣)
신라 熊州 湯井郡(아산시)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牙山市 靈仁面 牙山里(面所). 다른 기록에는 陰岑縣이라고도 하였다.
[역주:36권105] 아술현(牙述縣)
신라 熊州 湯井郡 陰峯縣(아산시 영인면)의 백제 때 지명.
[역주:36권106] 아주(牙州)
신라 熊州 湯井郡 陰峯縣(아산시 영인면)의 고려시대 지명. 陰峯縣을 고려 초에 仁州로 고쳤다. 성종이 刺史를 두었고, 목종이 이를 폐지하였다. 현종이 天安府의 屬縣으로 삼았으며, 뒤에 牙州로 이름을 고치고 監務를 두었다. 조선 태종이 牙山으로 이름을 고치고 縣監을 두었다. 세조가 縣을 없앴다가 뒤에 복구하였다. 고종이 郡으로 고쳤다. 《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高勇山이 牙山縣北 12리에 있고 鷰巖山이 縣東 19리에 있다고 하므로, 牙山縣治는 현재의 牙山市 靈仁面 牙山里(面所)에 있었다.
[역주:36권107] 기량현(祁梁縣)
신라 熊州 湯井郡(아산시)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牙山市 新昌面 邑內里.
[역주:36권108] 굴직현(屈直縣)
신라 熊州 湯井郡 祁梁縣(아산시 신창면)의 백제 때 지명. 다른 기록에는 屈旨縣이라고도 나온다.
[역주:36권109] 신창현(新昌縣)
신라 熊州 湯井郡 祁梁縣(아산시 신창면)의 고려시대 지명. 祁梁縣을 고려 초에 新昌縣으로 이름을 고쳤고, 현종이 天安府의 屬縣으로 삼았다. 공양왕이 萬戶兼監務를 두었다. 조선 태조가 萬戶를 생략하였다. 태종이 溫水(아산시)에 합하여 溫昌이라고 하였다가, 뒤에 다시 나누어 縣監으로 삼았다. 고종이 郡으로 고쳤다. 현재의 위치는 牙山市 新昌面 邑內里(舊 新昌)에 해당한다.
[역주:36권110] 전주(全州)
신라 9州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全州市. 신라 말에 후백제 甄萱이 이곳에 도읍을 정하였으나, 고려 太祖가 이를 멸하고 安南都護府로 이름을 고쳤다가 同 23년(940)에 다시 全州로 이름을 고쳤다. 顯宗이 全州牧으로 삼았다. 고려 말에 完山府로 이름을 고쳤는데, 조선 太宗이 全州府로 다시 이름을 고쳤다. 고종이 郡으로 고쳤다.
[역주:36권111] 완산(完山)
신라 全州(전주시)의 백제 때 지명. 다른 기록에는 比斯伐 또는 比自火라고도 나온다.
[역주:36권112] 완산주(完山州)
신라 全州(전주시)의 옛 지명. 본서 권40 직관지 무관조에 신라 六停의 하나로서 完山停이 나오며, 본래는 下州停이었는데 신문왕 5년에 폐지하고 完山停을 설치하였다고 되어 있다. 다만 권4 신라본기 진흥왕 16년(555) 및 26년조(565)에 比斯伐에 完山州를 置廢하였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이는 직관지 및 지리지의 기록과 같이 경남 창녕에 있었던 下州의 잘못으로 보아야 한다(李康來, 〈百濟 「比斯伐」考〉, 《崔永禧先生華甲紀念韓國史學論叢》, 探求堂, 1987).
[역주:36권113] 두성현(杜城縣)
신라 全州(전주시)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完州郡 伊西面 伊城里 일대.
[역주:36권114] 두이현(豆伊縣)
신라 全州 杜城縣(완주군 이서면)의 백제 때 지명. 다른 기록에는 往武縣이라고도 나온다. 본서 권37 지리지에 나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따르면 豆尸를 都督府 魯山州(익산시 함라면) 소속의 淳遲縣으로 고치려 한 적이 있었으니, 두시는 두이현의 다른 호칭이었던 듯하다.
[역주:36권115] 이성현(伊城縣)
신라 全州 杜城縣(완주군 이서면)의 고려시대 지명. 杜城縣을 고려가 伊城縣으로 이름을 고쳐 그대로 全州의 屬縣으로 삼았으며, 全州 서쪽 25리에 있었다.
[역주:36권116] 금구현(金溝縣)
신라 全州(전주시)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金堤市 金溝面. 본래는 백제 仇知只山縣이었는데, 신라 경덕왕이 金溝縣으로 이름을 고쳤다. 고려 의종이 縣令으로 높였다. 조선 고종이 郡으로 고쳤다.
[역주:36권117] 구지지산현(仇知只山縣)
신라 全州 金溝縣(김제시 금구면)의 백제 때 지명. 다른 기록에는 仇智山縣이라고도 나온다. 본서 권37 지리지에 나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따르면 仇知只山을 東明州 소속의 唐山縣으로 고치려 한 적이 있었다.
[역주:36권118] 고산현(高山縣)
신라 全州(전주시)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完州郡 高山面. 다른 기록에는 難等良이라고도 나온다. 고려 현종이 全州의 屬縣으로 삼았으며, 뒤에 監務를 두고 珍同(금산군 진산면)을 겸임케 하였다. 조선 태조가 도로 나누었고, 뒤에 縣監으로 고쳤다. 고종이 郡으로 고쳤다.
[역주:36권119] 남원소경(南原小京)
신라 全州(전주시)에 속한 小京으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南原市. 신문왕 11년에 南原城을 쌓았다.
[역주:36권120] 고룡군(古龍郡)
신라 全州 南原小京(남원시)의 백제 때 지명. 다른 기록에는 南原이라고도 나온다.
[역주:36권121] 남원부(南原府)
신라 全州 南原小京(남원시)의 고려시대 지명. 南原小京을 고려 태조가 이름을 그대로 두고 府로 고쳤다. 충선왕이 帶方郡으로 고쳤다가 뒤에 南原郡으로 고쳤다. 공민왕이 다시 府로 높였다. 태종이 都護府로 고쳤다. 영조가 一新縣으로 낮추었다가 뒤에 南原府로 복구하였다. 고종이 郡으로 고쳤다.
[역주:36권122] 대산군(大山郡)
신라 全州(전주시)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井邑市 七寶面. 본서 권3 신라본기 訥祗麻立干 36년(452)조에 大山郡에서 嘉禾를 바쳤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이는 다른 곳을 가리키든지, 아니면 신라 下代의 기사가 이 곳에 잘못 편입된 예가 아닐까 한다.
[역주:36권123] 대시산군(大尸山郡)
신라 全州 大山郡(정읍시 칠보면)의 백제 때 지명. 본서 권37 지리지에 나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따르면 大尸山을 古四州(정읍시 고부면) 소속의 帶山縣으로 고치려 한 적이 있었다.
[역주:36권124] 태산군(泰山郡)
신라 全州 大山郡(정읍시 칠보면)의 고려시대 지명. 다른 기록에는 太山郡이라고도 나온다. 泰山郡을 고려가 古阜郡의 屬郡으로 삼았으며, 뒤에 監務를 두고 仁義縣을 겸임케 하였다. 현종이 도로 나누었고, 공민왕이 郡으로 높였다. 조선 태종이 또 仁義를 합하여 泰仁縣으로 이름을 고치고 치소를 居山驛(정읍시 태인면)으로 옮겼다. 옛 泰山은 泰仁縣 동쪽 20리에 있었다. 고종이 郡으로 고쳤다. 里數로 따져 보고 《大東輿地圖》와 비교해 볼 때, 옛 泰山郡은 현재의 井邑市 七寶面 面所인 詩山里 일대에 해당한다.
[역주:36권125] 정읍현(井邑縣)
신라 全州 大山郡(정읍시 칠보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井邑市. 고려가 古阜郡의 屬縣으로 삼았다가 뒤에 監務를 두었다. 조선이 縣監으로 고쳤다. 고종이 郡으로 고쳤다.
[역주:36권126] 정촌(井村)
신라 全州 大山郡 井邑縣(정읍시)의 백제 때 지명. 다른 기록에는 井村縣이라고도 나온다.
[역주:36권127] 빈성현(斌城縣)
신라 全州 大山郡(정읍시 칠보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井邑市 淨雨面.
[역주:36권128] 빈굴현(賓屈縣)
신라 全州 大山郡 斌城縣(정읍시 정우면)의 백제 때 지명. 다른 기록에는 賦城縣이라고도 나온다. 본서 권5 신라본기 무열왕 8년(661) 4월조에 나오는 賓骨壤은 곧 賓屈縣의 異稱인 듯하다.
[역주:36권129] 인의현(仁義縣)
신라 全州 大山郡 斌城縣(정읍시 정우면)의 고려시대 지명. 斌城縣을 고려가 仁義縣으로 이름을 고쳐 古阜郡의 屬縣으로 삼고 泰山監務가 와서 겸임케 하였다. 현종이 이를 나누어 監務를 두었다. 조선 태종이 泰山과 합하여 泰仁縣(정읍시 태인면)에 넣었으며, 仁義廢縣은 그 서쪽 10리에 있었다. 里數로 따져 보고 《大東輿地圖》와 비교해 볼 때, 옛 仁義縣은 현재의 정읍시 淨雨面 面所인 水金里 일대에 해당한다.
[역주:36권130] 야서현(野西縣)
신라 全州 大山郡(정읍시 칠보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金堤市 金山面 雙龍里(面所).
[역주:36권131] 야서이현(也西伊縣)
신라 全州 大山郡 野西縣(김제시 금산면)의 백제 때 지명.
[역주:36권132] 거야현(巨野縣)
신라 全州 大山郡 野西縣(김제시 금산면)의 고려시대 지명. 野西縣을 고려가 巨野縣으로 이름을 고쳐서 全州의 屬縣으로 삼았다. 뒤에 金堤縣에 속하게 하였고, 뒤에 또 金溝縣(김제시 금구면)에 내속시켰으며, 金溝縣 남쪽 15리에 있었다. 里數로 따져 보고 《大東輿地圖》와 비교해 볼 때, 옛 巨野縣은 현재의 金堤市 金山面 雙龍里(面所) 일대에 해당한다.
[역주:36권133] 고부군(古阜郡)
신라 全州(전주시)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井邑市 古阜面. 고려 태조가 瀛州로 고치고 觀察使를 두었고, 광종이 安南都護府로 고쳤다. 현종이 다시 古阜郡으로 고쳤다. 충렬왕이 靈光郡에 병합시켰다가 얼마 뒤에 다시 복구하였다. 조선이 그대로 두었다.
[역주:36권134] 고사부리군(古沙夫里郡)
신라 全州 古阜郡(정읍시 고부면)의 백제 때 지명. 《周書》 권49 百濟傳에 의하면 5方 중의 하나인 中方 古沙城이었다. 본서 권37 지리지에 나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따르면 古沙夫里 또는 古沙夫村을 古四州(정읍시 고부면) 州治인 平倭縣으로 고치려 한 적이 있었다.
[역주:36권135] 부령현(扶寧縣)
신라 全州 古阜郡(정읍시 고부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扶安郡 扶安邑. 고려가 그대로 古阜郡의 屬縣으로 삼았다가 뒤에 監務를 두고 保安縣을 겸임케 하였다. 우왕이 두 縣 모두 監務를 두었다. 조선 태종이 保安을 다시 扶寧에 합쳐서 扶安縣으로 이름을 고쳤고, 이듬 해에 兵馬使兼判事로 삼았다. 세종이 僉節制使로 고쳤다가 뒤에 縣監으로 고쳤다. 고종이 郡으로 고쳤다.
[역주:36권136] 개화현(皆火縣)
신라 全州 古阜郡 扶寧縣(부안군 부안읍)의 백제 때 지명.
[역주:36권137] 희안현(喜安縣)
신라 全州 古阜郡(정읍시 고부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扶安郡 保安面.
[역주:36권138] 흔량매현(欣良買縣)
신라 全州 古阜郡 喜安縣(부안군 보안면)의 백제 때 지명.
[역주:36권139] 보안현(保安縣)
신라 全州 古阜郡 喜安縣(부안군 보안면)의 고려시대 지명. 喜安縣을 고려가 保安縣으로 이름을 고쳐 그대로 古阜郡에 속하게 두었다. 뒤에 扶寧監務가 와서 겸임케 하다가, 우왕이 따로 監務를 두었다. 조선 태종이 扶寧에 합쳐 넣으면서 扶安縣으로 이름을 고쳤다.
[역주:36권140] 상질현(尙質縣)
신라 全州 古阜郡(정읍시 고부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高敞郡 興德面. 고려가 그대로 古阜郡에 속하게 하였다가, 뒤에 章德縣(또는 昌德縣)으로 이름을 고치고 監務를 두되 高敞을 겸임케 하였다. 충선왕이 興德縣으로 이름을 고쳤다. 조선 태조가 다시 나누었고, 뒤에 縣監으로 삼았다. 고종이 郡으로 고쳤다.
[역주:36권141] 상칠현(上柒縣)
신라 全州 古阜郡 尙質縣(고창군 흥덕면)의 백제 때 지명. 본서 권37 지리지에 나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따르면 上杜를 都督府 古四州(정읍시 고부면) 소속의 佐贊縣으로 고치려 했던 적이 있었으니, 上杜는 上柒의 異稱일 가능성이 높다.
[역주:36권142] 진례군(進禮郡)
신라 全州(전주시)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錦山郡 錦山邑. 고려가 縣令으로 낮추었다. 충렬왕이 知錦州事로 높였다. 조선 태종이 錦山郡으로 고쳤다. 한편 권12 신라본기 및 권50 견훤전의 신라 경명왕 4년(920)조에 나오는 進禮城을 이곳으로 보는 설도 있으나(文柄憲, 〈後百濟의 興亡考〉, 《百濟文化》 1, 1976, 3쪽), 이 성은 金海郡 進禮面 新安里·松亭里에 걸쳐 있는 토성, 즉 進禮山城을 가리킨다(金侖禹, 〈新羅末의 仇史城과 進禮城考〉, 《史學志》 22, 155∼160쪽). 이를 淸道邑 오리산성(古 烏禮山城)에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李丙燾, 《國譯 三國史記》, 203쪽).
[역주:36권143] 진잉을군(進仍乙郡)
신라 全州 進禮郡(금산군 금산읍)의 백제 때 지명. 다른 기록에는 進乃郡이라고도 나온다.
[역주:36권144] 이성현(伊城縣)
신라 全州 進禮郡(금산군 금산읍)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茂朱郡 富南面.
[역주:36권145] 두시이현(豆尸伊縣)
신라 全州 進禮郡 伊城縣(무주군 부남면)의 백제 때 지명. 다른 기록에는 富尸伊縣이라고도 나온다. 본서 권5 신라본기 무열왕 7년(660) 8월 2일조에 나오는 豆尸原嶽은 이 곳을 가리키는 듯하다.
[역주:36권146] 부리현(富利縣)
신라 全州 進禮郡 伊城縣(무주군 부남면)의 고려시대 지명. 伊城縣을 고려가 富利縣으로 이름을 고쳤고, 명종이 監務를 두었다. 뒤에 다시 錦州(금산군 금산읍)에 속하게 하였으며, 錦山郡 동남 60리에 있었다. 里數를 따지고 《大東輿地圖》와 비교해 볼 때, 현재의 忠淸南道 錦山郡 富里面은 이름이 같으나 거리가 있고, 위치상 全羅北道 茂朱郡 富南面에 해당한다.
[역주:36권147] 청거현(淸渠縣)
신라 全州 進禮郡(금산군 금산읍)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鎭安郡 龍潭面. 고려 충선왕이 龍潭縣으로 이름을 고치고 縣令으로 삼았다. 조선 고종이 郡으로 고쳤다.
[역주:36권148] 물거현(勿居縣)
신라 全州 進禮郡 淸渠縣(진안군 용담면)의 백제 때 지명.
[역주:36권149] 단천현(丹川縣)
신라 全州 進禮郡(금산군 금산읍)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茂朱郡 茂朱邑.
[역주:36권150] 적천현(赤川縣)
신라 全州 進禮郡 丹川縣(무주군 무주읍)의 백제 때 지명.
[역주:36권151] 주계현(朱溪縣)
신라 全州 進禮郡 丹川縣(무주군 무주읍)의 고려시대 지명. 丹川縣을 고려가 朱溪縣으로 고쳐 그대로 進禮縣(금산읍)에 속하게 하였다. 명종이 茂豊監務가 와서 겸임토록 하였고, 공양왕이 茂豊에 병합시켰다. 조선 태종이 茂朱縣으로 이름을 고쳐 縣監을 두고 朱溪를 治所로 삼았다. 현종이 錦山郡 安城·橫川의 두 面을 떼어내 병합시키고 府로 높였다. 고종이 郡으로 고쳤다.
[역주:36권152] 덕은군(德殷郡)
신라 全州(전주시)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論山市 可也谷面.
[역주:36권153] 덕근군(德近郡)
신라 全州 德殷郡(논산시 가야곡면)의 백제 때 지명. 周書 百濟傳에 의하면 5方 중의 하나인 東方 得安城이었다. 본서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20년(660) 6월조에 당이 백제 멸망 후 이 곳에 德安都督府를 설치하였다고 하였다. 권6 신라본기 문무왕 3년(663) 2월조에는 德安城이라고 나온다. 본서 권37 지리지 總章 2년(669)에 나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따르면 德近支를 都督府 직속의 得安縣으로 고치려 한 적이 있었다.
[역주:36권154] 덕은군(德恩郡)
신라 全州 德殷郡(논산시 가야곡면)의 고려시대 지명. 德殷郡을 고려 초에 德恩郡으로 이름을 고쳤고, 현종이 公州의 屬郡으로 삼았다. 조선 태조가 市津縣과 합하여 德恩監務로 삼았고, 세종이 恩津縣(논산시 은진면)으로 이름을 고치고 縣監으로 삼았으며, 옛 德恩은 縣 동남쪽 12리에 있었다. 인조가 尼城·連山과 합쳐서 한 縣으로 삼았고, 효종이 복구하였다. 고종이 郡으로 고쳤다. 里數로 따져 볼 때, 고려시대의 德恩郡은 현재의 論山市 可也谷面 六谷里 일대에 해당한다.
[역주:36권155] 시진현(市津縣)
신라 全州 德殷郡(논산시 가야곡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忠淸南道 論山市. 고려 현종이 公州의 屬縣으로 삼았다. 조선 태조가 德恩縣과 합하여 德恩監務로 삼았고, 세종이 恩津縣(논산시 은진면)으로 이름을 고치고 縣監으로 삼았으며, 옛 市津縣은 皇華山 서남쪽에 있었다. 《東國輿地勝覽》에 皇華山은 恩津縣(논산시 은진면)의 서쪽 10리에 있다고 하였고, 《大東輿地圖》에 옛 市津縣의 위치를 恩津의 서북쪽으로 표기하였으니, 현재의 論山市 일대에 해당한다.
[역주:36권156] 가지나현(加知奈縣)
신라 全州 德殷郡 市津縣(논산시)의 백제 때 지명. 다른 기록에는 加乙乃 또는 薪浦라고도 나온다.
[역주:36권157] 여량현(礪良縣)
신라 全州 德殷郡(논산시 가야곡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益山市 礪山面. 다른 기록에는 礪陽縣이라고도 나온다. 고려 현종이 全州의 屬縣으로 삼았다. 공양왕이 監務를 두고 朗山縣(익산시 낭산면)을 겸임시켰다. 조선 정종이 이름을 礪山縣이라고 고쳤다. 세종이 郡으로 높였다. 숙종이 府로 높였고, 고종이 郡으로 고쳤다.
[역주:36권158] 지량초현(只良肖縣)
신라 全州 德殷郡 礪良縣(익산시 여산면)의 백제 때 지명.
[역주:36권159] 운제현(雲梯縣)
신라 全州 德殷郡(논산시 가야곡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完州郡 華山面 雲梯里 일대. 고려가 全州의 屬縣으로 삼았다. 조선 태조가 高山縣(완주군 고산면)에 속하게 하였다.
[역주:36권160] 지벌지현(只伐只縣)
신라 全州 德殷郡 雲梯縣(완주군 화산면)의 백제 때 지명. 다른 기록에는 共伐共縣이라고도 나온다.
[역주:36권161] 임피군(臨陂郡)
신라 全州(전주시)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群山市 臨陂面. 고려가 縣令으로 낮추었다. 조선 고종이 郡으로 고쳤다.
[역주:36권162] 시산군(屎山郡)
신라 全州 臨陂郡(군산시 임피면)의 백제 때 지명. 다른 기록에는 陂山, 또는 忻文, 또는 所島, 또는 失鳥出이라고도 나온다.
[역주:36권163] 함열현(咸悅縣)
신라 全州 臨陂郡(군산시 임피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益山市 咸羅面. 고려 초에 全州의 屬縣으로 삼았고, 명종이 監務를 두었다. 조선 태종이 龍安(익산시 용안면)에 합쳐서 安悅縣으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복구하여 縣監으로 삼았다. 고종이 郡으로 고쳤다. 《東國輿地勝覽》 咸悅縣 山川條에 咸羅山이 縣 서쪽 2리에 있다고 한 점으로 보아, 고려·조선시대의 咸悅縣治는 현재의 咸悅邑이 아니라 咸羅面 面所인 咸悅里 일대에 해당한다.
[역주:36권164] 감물아현(甘勿阿縣)
신라 全州 臨陂郡 咸悅縣(익산시 함라면)의 백제 때 지명. 본서 권37 지리지에 나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따르면 甘勿阿를 都督府 魯山州 州治인 魯山縣으로 고치려 했던 적이 있었다.
[역주:36권165] 옥구현(沃溝縣)
신라 全州 臨陂郡(군산시 임피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群山市 沃溝邑. 고려가 그대로 臨陂縣의 屬縣으로 삼았다. 조선 태조가 鎭을 두고 兵馬使兼縣事로 삼았으며, 세종이 僉節制使로 삼았다가 뒤에 縣監으로 고쳤다. 고종이 郡으로 고쳤다.
[역주:36권166] 마서량현(馬西良縣)
신라 全州 臨陂郡 沃溝縣(군산시 옥구읍)의 백제 때 지명. 본서 권37 지리지에 나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따르면 麻斯良을 都督府 소속의 歸化縣으로 고치려 한 적이 있었으니, 麻斯良은 馬西良의 異稱일 가능성이 있다.
[역주:36권167] 회미현(澮尾縣)
신라 全州 臨陂郡(군산시 임피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群山市 澮縣面. 일명 連江이라고도 하였다. 고려가 그대로 臨陂縣의 屬縣으로 두었다. 조선 태종이 沃溝縣에 속하게 하였다.
[역주:36권168] 부부리현(夫夫里縣)
신라 全州 臨陂郡 澮尾縣(군산시 회현면)의 백제 때 지명.
[역주:36권169] 김제군(金堤郡)
신라 全州(전주시)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金堤市. 고려 초에 全州의 屬郡으로 삼았으며, 인종이 縣令을 두었다. 조선 태종이 郡으로 높였다.
[역주:36권170] 벽골현(碧骨縣)
신라 全州 金堤郡(김제시)의 백제 때 지명. 다른 기록에는 碧骨郡이라고도 나온다. 본서 권37 지리지에 나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따르면 辟骨을 古四州(정읍시 고부면) 소속의 辟城縣(벽성현)으로 고치려 한 적이 있었다.
[역주:36권171] 만경현(萬頃縣)
신라 全州 金堤郡(김제시)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金堤市 萬頃面. 고려가 臨陂縣의 屬縣으로 삼았다. 예종이 監務를 두었고, 뒤에 縣令으로 높였다. 조선 광해군이 金堤에 넣었다가 뒤에 全州에 넣었다. 인조가 다시 縣을 설치하였다. 고종이 郡으로 고쳤다.
[역주:36권172] 두내산현(豆乃山縣)
신라 全州 金堤郡 萬頃縣(김제시 만경면)의 백제 때 지명. 본서 권37 지리지에 나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따르면 豆奈只를 都督府 古四州(정읍시 고부면) 소속의 淳牟縣으로 고치려 한 적이 있었으니, 豆奈只는 豆乃山의 異稱인 듯하다.
[역주:36권173] 평고현(平皐縣)
신라 全州 金堤郡(김제시)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金堤市 龍池面. 고려 초에 全州의 屬縣으로 삼았고, 뒤에 金堤縣에 다시 속하게 하였으며, 平皐廢縣은 金堤郡 동쪽 25리에 있었다. 《大東輿地圖》의 표시로 보아, 현재의 金堤市 龍池面 일대에 해당한다.
[역주:36권174] 수동산현(首冬山縣)
신라 全州 金堤郡 平皐縣(김제시 용지면)의 백제 때 지명.
[역주:36권175] 이성현(利城縣)
신라 全州 金堤郡(김제시)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金堤市 靑蝦面. 고려 초에 全州의 屬縣으로 삼았으며, 利城廢縣은 全州 서쪽 75리에 있었다. 《大東輿地圖》의 표기와 비교해 보아, 현재의 金堤市 靑蝦面 面所인 東之山里(古名 童子浦) 일대에 해당한다.
[역주:36권176] 내리아현(乃利阿縣)
신라 全州 金堤郡 利城縣(김제시 청하면)의 백제 때 지명.
[역주:36권177] 무읍현(武邑縣)
신라 全州 金堤郡(김제시)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金堤市 聖德面.
[역주:36권178] 무근촌현(武斤村縣)
신라 全州 金堤郡 武邑縣(김제시 성덕면)의 백제 때 지명. 다른 기록에는 武斤縣이라고도 나온다.
[역주:36권179] 부윤현(富潤縣)
신라 全州 金堤郡 武邑縣(김제시 성덕면)의 고려시대 지명. 武邑縣을 고려가 富潤縣으로 이름을 고쳐 臨陂縣의 屬縣으로 삼았고, 뒤에 萬頃縣에 속하게 하였으며, 富潤廢縣은 萬頃縣 남쪽 13리에 있었다. 里數를 따지고 《大東輿地圖》의 方面 표기와 비교해 볼 때, 현재의 金堤市 聖德面 石洞里(面所) 일대에 해당하는 듯하다.
[역주:36권180] 순화군(淳化郡)
신라 全州(전주시)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淳昌郡 淳昌邑. 다른 기록에는 渟化郡이라고도 나온다.
[역주:36권181] 도실군(道實郡)
신라 全州 淳化郡(순창군 순창읍)의 백제 때 지명.
[역주:36권182] 순창현(淳昌縣)
신라 全州 淳化郡(순창군 순창읍)의 고려시대 지명. 淳化郡을 고려가 淳昌縣으로 고쳐서 南原府의 屬郡으로 삼았다. 명종이 監務를 두었고, 충숙왕이 郡으로 높였다.
[역주:36권183] 적성현(磧城縣)
신라 全州 淳化郡(순창군 순창읍)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淳昌郡 赤城面. 다른 기록에는 赤城이라고도 나온다. 고려 초에 南原府의 屬縣으로 삼았고, 뒤에 淳昌郡에 속하게 하였다.
[역주:36권184] 역평현(礫坪縣)
신라 全州 淳化郡 磧城縣(순창군 적성면)의 백제 때 지명.
[역주:36권185] 구고현(九皐縣)
신라 全州 淳化郡(순창군 순창읍)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任實郡 靑雄面 九皐里(面所) 일대. 고려 초에 南原府의 屬縣으로 삼았다. 공민왕이 郡으로 높였다. 조선 태조가 任實縣에 속하게 하였다.
[역주:36권186] 돌평현(堗坪縣)
신라 全州 淳化郡 堗坪縣(임실군 청웅면)의 백제 때 지명. 다른 기록에는 沃坪이라고도 나온다.
[역주:36권187] 금마군(金馬郡)
신라 全州(전주시)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益山市 金馬面. 고려가 全州의 屬郡으로 삼았다. 충혜왕이 益州로 높였다. 조선 태종이 益山郡으로 이름을 고쳤다.
[역주:36권188] 금마저군(金馬渚郡)
신라 全州 金馬郡(익산시 금마면)의 백제 때 지명. 古朝鮮 準王이 이 곳으로 도망와서 馬韓을 세웠다는 전승이 있어서, 龍華山 위에 남아 있는 石築의 山城을 속칭 箕準城이라고 부른다. 본서 권8 신라본기 신문왕 4년(684)조에 報德國王 安勝의 族子 大文 및 悉伏 등이 모반하므로 진압하고 그 곳을 金馬郡으로 칭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역주:36권189] 옥야현(沃野縣)
신라 全州 金馬郡(익산시 금마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益山市(舊 裡里市). 고려 초에 全州의 屬縣으로 삼았다. 명종이 監務를 두었고, 뒤에 다시 全州에 속하게 하였으며, 全州 서북 70리에 있었다. 《大東輿地圖》와 비교해 볼 때, 현재의 익산시(구 裡里市) 일대인 듯하다.
[역주:36권190] 소력지현(所力只縣)
신라 全州 金馬郡 沃野縣(익산시)의 백제 때 지명.
[역주:36권191] 야산현(野山縣)
신라 全州 金馬郡(익산시 금마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益山市 朗山面.
[역주:36권192] 알야산현(閼也山縣)
신라 全州 金馬郡 野山縣(익산시 낭산면)의 백제 때 지명. 본서 권4 신라본기 진지왕 3년(578)조에 『與百濟閼也山城』이라는 기록이 나오는데, 일설에서는 여기서의 ‘與’를 ‘擧’의 잘못으로 보아 『신라가 백제의 알야산성을 침공하였다.』고 보았다(李丙燾, 《國譯 三國史記》, 63쪽). 그러나 이 기사는 백제 멸망 이후 百濟復興軍과 신라 사이의 전투 기사로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한다.
[역주:36권193] 낭산현(朗山縣)
신라 全州 金馬郡 野山縣(익산시 낭산면)의 고려시대 지명. 野山縣을 고려가 朗山縣으로 이름을 고쳐서 全州의 屬縣으로 삼았다. 공양왕이 礪良(익산시 여산면)監務가 와서 겸임토록 하였다. 조선 정종이 礪良·朗山 두 縣의 이름을 따서 礪山縣이라고 고쳤고, 세종이 郡으로 높였다.
[역주:36권194] 우주현(紆洲縣)
신라 全州 金馬郡(익산시 금마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完州郡 鳳東邑 長久里 일대.
[역주:36권195] 우소저현(于召渚縣)
신라 全州 金馬郡 紆洲縣(완주군 봉동읍 장구리)의 백제 때 지명.
[역주:36권196] 우주(紆州)
신라 全州 金馬郡 紆洲縣(완주군 봉동읍 장구리)의 고려시대 지명. 다른 기록에는 汚州라고도 나온다. 紆洲縣을 고려 초에 全州의 屬縣으로 삼았으며, 紆州廢縣은 全州 북쪽 50리에 있었다. 《大東輿地圖》의 표기와 비교해 볼 때, 현재의 完州郡 鳳東邑에서 서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長久里 일대에 해당하는 듯하다.
[역주:36권197] 벽계군(壁谿郡)
신라 全州(전주시)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長水郡 溪內面.
[역주:36권198] 백이군(伯伊郡)
신라 全州 壁谿郡(장수군 계내면)의 백제 때 지명. 다른 기록에는 伯海郡이라고도 나온다.
[역주:36권199] 장계현(長溪縣)
신라 全州 壁谿郡(장수군 계내면)의 고려시대 지명. 壁谿郡을 고려가 長溪縣으로 이름을 고치고 南原府의 屬縣으로 삼았고, 뒤에 長水縣에 속하게 하였다. 현재의 溪內面 面所인 長溪里 일대에 해당한다.
[역주:36권200] 진안현(鎭安縣)
신라 全州 壁谿郡(장수군 계내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鎭安郡 鎭安邑. 고려 초에 全州의 屬縣으로 삼았다. 뒤에 監務를 두었다. 조선 태종이 縣監으로 삼았다. 고종이 郡으로 고쳤다.
[역주:36권201] 난진아현(難珍阿縣)
신라 全州 壁谿郡 鎭安縣(진안군 진안읍)의 백제 때 지명. 다른 기록에는 月良이라고도 나온다. 다른 기록에는 難知可縣이라고도 나오며, 《三國史節要》 권12 宣德王 4년(783)조에는 難知可‘郡’으로 표기되어 있다.
[역주:36권202] 고택현(高澤縣)
신라 全州 壁谿郡(장수군 계내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長水郡 長水邑.
[역주:36권203] 우평현(雨坪縣)
신라 全州 壁谿郡 高澤縣(장수군 장수읍)의 백제 때 지명.
[역주:36권204] 장수현(長水縣)
신라 全州 壁谿郡 高澤縣(장수군 장수읍)의 고려시대 지명. 高澤縣을 고려 초에 長水縣으로 이름을 고쳐 南原府의 屬縣으로 삼았다. 공양왕이 長溪(장수군 계내면)를 겸임케 하였다. 조선 태조가 다시 나누어 長水縣으로 삼고 長溪監務를 겸하게 하였다. 태종이 縣監으로 고쳤다. 고종이 郡으로 고쳤다.
[역주:36권205] 임실군(任實郡)
신라 全州(전주시)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任實郡 任實邑. 고려가 南原府의 屬郡으로 삼았다. 명종이 監務를 두었다. 조선 태종이 縣監으로 고쳤다. 고종이 郡으로 고쳤다.
[역주:36권206] 마령현(馬靈縣)
신라 全州 任實郡(임실군 임실읍)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鎭安郡 馬靈面. 고려 초에 全州의 屬縣으로 삼았다. 뒤에 鎭安監務로 하여금 와서 겸임케 하였다. 조선 태종이 그대로 鎭安縣에 소속시켰다.
[역주:36권207] 마돌현(馬突縣)
신라 全州 任實郡 馬靈縣(진안군 마령면)의 백제 때 지명. 다른 기록에는 馬珍 또는 馬等良이라고도 나온다.
[역주:36권208] 청웅현(靑雄縣)
신라 全州 任實郡(임실군 임실읍)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長水郡 蟠巖面. 다만 그 지명인 蟠岩은 한자 발음상으로 ‘서릴(반)’의 ‘반암’이어야 하는데, 그 지역 분들이 대개 ‘번암’이라고 말하고 또 국립지리원이 심사하여 발행한 《한글판 한국도로지도》(1996, 중앙지도문화사)에도 ‘번암면’으로 표기하였기 때문에 그대로 따른다.
[역주:36권209] 거사물현(居斯勿縣)
신라 全州 任實郡 靑雄縣(장수군 번암면)의 백제 때 지명. 본서 권6 신라본기 문무왕 3년(663) 2월조에 나오는 居勿城은 이 곳에 비정된다. 본서 권40 직관지 下 武官條에 신라 十停의 하나로서 居斯勿停이 나온다. 한편 본서 권37 지리지에 나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따르면 支潯州 소속 隆化縣의 본래 지명이 居斯勿이었다고 하는데, 州治인 예산 방면과는 너무 멀어서 이 곳과는 다른 곳인 듯하다.
[역주:36권210] 거령현(居寧縣)
신라 全州 任實郡 靑雄縣(장수군 번암면)의 고려시대 지명. 다른 기록에는 巨寧이라고도 나온다. 靑雄縣을 고려가 居寧縣으로 이름을 고치고 南原府의 屬縣으로 삼았다. 別號는 寧城이다. 居寧廢縣이 南原府 동북쪽 50리에 있었다는 《東國輿地勝覽》의 里數를 따지고 《大東輿地圖》와 비교해 볼 때, 현재의 長水郡 蟠巖面 일대에 해당한다.
[역주:36권211] 무주(武州)
신라 9州의 하나로서, 현재의 光州廣域市 東區 일대. 고려 太祖가 光州로 이름을 고쳤다.
[역주:36권212] 무진주(武珍州)
신라 武州(광주광역시 동구)의 옛 지명. 다른 기록에는 奴只라고도 나온다. 본서 권8 신라본기 신문왕 6년(686) 2월조에 發羅州를 郡으로 삼고 武珍郡을 州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권7 문무왕 18년(678) 4월조에 이미 阿湌 天訓을 武珍州都督으로 삼았다는 기사가 있어서, 武珍州의 성립 연대를 둘 중 어느 것으로 보아야 할지 분명치 않다.
[역주:36권213] 광주(光州)
신라 武州(광주광역시 동구)의 고려시대 지명. 武州를 고려 태조가 光州로 이름을 고쳤다. 성종이 刺史로 낮추었다가 뒤에 더 낮추어 海陽縣令으로 삼았다. 고종이 知翼州事로 높였고 뒤에 武珍州로 높였다. 충선왕이 化平府로 낮추었고, 공민왕이 茂珍府로 고쳤다가 다시 光州牧으로 고쳤다. 조선 세종이 茂珍郡으로 낮추었고, 문종이 복구하였다. 성종이 光山縣으로 낮추었고, 燕山君이 다시 州로 높였다. 인조가 縣으로 낮추었다가 뒤에 다시 높였다. 고종이 郡으로 고쳤다.
[역주:36권214] 현웅현(玄雄縣)
신라 武州(광주광역시 동구)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羅州市 南平面.
[역주:36권215] 미동부리현(未冬夫里縣)
신라 武州 玄雄縣(나주시 남평면)의 백제 때 지명. 본서 권40 직관지 下 武官條에 신라 十停의 하나로서 未多夫里停이 나온다.
[역주:36권216] 남평군(南平郡)
신라 武州 玄雄縣(나주시 남평면)의 고려시대 지명. 다른 기록에는 永平이라고도 나온다. 玄雄縣을 고려가 南平으로 이름을 고치고 郡으로 삼아 羅州의 屬郡으로 삼았다. 명종이 監務를 두었고, 공양왕이 和順(화순군 화순읍)監務가 와서 겸임토록 하였다. 조선 태조가 따로 監務를 두었고, 뒤에 例에 따라 縣監으로 고쳤다. 고종이 郡으로 고쳤다.
[역주:36권217] 용산현(龍山縣)
신라 武州(광주광역시 동구)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光州廣域市 光山區 伏龍洞 일대. 본서 권37 지리지에 나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따르면 都督府 직속의 龍山縣은 본래 古麻山이었다고 하였다. 다만 본래의 명칭이 다르고, 都督府로 추정되는 부여읍과 거리상으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같은 곳인지 의문이 간다.
[역주:36권218] 복룡현(伏龍縣)
신라 武州 龍山縣(광주광역시 광산구 복룡동)의 백제 때 지명. 다른 기록에는 盃龍이라고도 나온다. 龍山縣을 고려가 다시 伏龍縣으로 이름을 고쳐 羅州牧의 屬縣으로 삼았으며, 羅州 북쪽 30리에 있었다. 현재의 光州廣域市 光山區 서쪽 伏龍山 동남 방면의 伏龍洞 일대에 해당한다.
[역주:36권219] 기양현(祁陽縣)
신라 武州(광주광역시 동구)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潭陽郡 昌平面.
[역주:36권220] 굴지현(屈支縣)
신라 武州 祁陽縣(담양군 창평면)의 백제 때 지명.
[역주:36권221] 창평현(昌平縣)
신라 武州 祁陽縣(담양군 창평면)의 고려시대 지명. 다른 기록에는 鳴平이라고도 나온다. 祁陽縣을 고려가 昌平縣으로 이름을 고쳐서 羅州의 屬縣으로 삼았으며, 뒤에 縣令으로 높였다. 공양왕이 長平·甲鄕 勸農使를 겸하게 하였다. 조선 성종이 縣을 혁파하고 光州에 속하게 하였다가 뒤에 복구하였다. 고종이 郡으로 고쳤다.
[역주:36권222] 분령군(分嶺郡)
신라 武州(광주광역시 동구)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順天市 樂安面.
[역주:36권223] 분차군(分嵯郡)
신라 武州 分嶺郡(순천시 낙안면)의 백제 때 지명. 다른 기록에는 夫沙 또는 分沙라고도 나온다. 본서 권3 신라본기 나물왕 21년(376)조에 夫沙郡이 一角鹿을 바쳤다고 하였으니, 이 기사에 나오는 夫沙郡은 다른 곳을 가리키든지, 아니면 신라의 삼국 통일 이후 기사가 이 곳에 잘못 편입된 것인 듯하다.
[역주:36권224] 낙안군(樂安郡)
신라 武州 分嶺郡(순천시 낙안면)의 고려시대 지명. 다른 기록에는 陽岳이라고도 나온다. 分嶺郡을 고려가 樂安郡으로 이름을 고쳐서 羅州의 屬郡으로 삼았다. 명종이 監務를 두었고, 뒤에 다시 郡으로 고쳤다. 조선 중종이 縣으로 낮추었다가 뒤에 郡으로 복구하였다. 명종이 縣으로 낮추었고, 선조가 복구하였다.
[역주:36권225] 충렬현(忠烈縣)
신라 武州 分嶺郡(순천시 낙안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高興郡 南陽面.
[역주:36권226] 조조례현(助助禮縣)
신라 武州 分嶺郡 忠烈縣(고흥군 남양면)의 백제 때 지명.
[역주:36권227] 남양현(南陽縣)
신라 武州 分嶺郡 忠烈縣(고흥군 남양면)의 고려시대 지명. 忠烈縣을 고려가 南陽縣으로 이름을 고치고 寶城郡의 屬縣으로 삼았다. 조선 세종이 興陽縣(고흥군 고흥읍)에 속하게 하였다.
[역주:36권228] 조양현(兆陽縣)
신라 武州 分嶺郡(순천시 낙안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寶城郡 得粮面 兆陽里 일대. 고려가 寶城郡의 屬縣으로 삼았다. 조선 태조가 高興縣에 속하게 하였고, 세종이 다시 환속시켰다.
[역주:36권229] 동로현(冬老縣)
신라 武州 分嶺郡 兆陽縣(보성군 득량면)의 백제 때 지명.
[역주:36권230] 강원현(薑原縣)
신라 武州 分嶺郡(순천시 낙안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高興郡 豆原面.
[역주:36권231] 두힐현(豆肹縣)
신라 武州 分嶺郡 薑原縣(고흥군 두원면)의 백제 때 지명. 신라 武州 錦山郡 會津縣(나주시 다시면)의 백제 때 지명도 豆肹縣이어서, 백제 豆肹縣은 두 곳이 있었다.
[역주:36권232] 두원현(荳原縣)
신라 武州 分嶺郡 薑原縣(고흥군 두원면)의 고려시대 지명. 薑原縣을 고려가 荳原縣으로 이름을 고쳐서 寶城郡의 屬縣으로 삼았다. 인종이 監務를 두었고, 뒤에 長興府(장흥읍)에 속하게 하였다. 조선이 興陽縣(고흥군 고흥읍)에 속하게 하였다.
[역주:36권233] 백주현(栢舟縣)
신라 武州 分嶺郡(순천시 낙안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高興郡 東江面 大江里 일대.
[역주:36권234] 비사현(比史縣)
신라 武州 分嶺郡 栢舟縣(고흥군 동강면)의 백제 때 지명.
[역주:36권235] 태강현(泰江縣)
신라 武州 分嶺郡 栢舟縣(고흥군 동강면)의 고려시대 지명. 栢舟縣을 고려가 泰江縣으로 이름을 고쳐서 寶城郡의 屬縣으로 삼았다. 조선 세종이 興陽縣(고흥군 고흥읍)에 속하게 하였으며, 泰江廢縣은 興陽縣 북쪽 70리에 있었다. 현재의 高興郡 東江面 大江里 일대에 해당한다.
[역주:36권236] 보성군(寶城郡)
신라 武州(광주광역시 동구)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寶城郡 寶城邑. 고려 성종이 貝州刺史로 고쳤으며, 뒤에 다시 寶城郡으로 고쳤다.
[역주:36권237] 복홀군(伏忽郡)
신라 武州 寶城郡(보성군 보성읍)의 백제 때 지명.
[역주:36권238] 대로현(代勞縣)
신라 武州 寶城郡(보성군 보성읍)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寶城郡 會泉面 會寧里 일대.
[역주:36권239] 마사량현(馬斯良縣)
신라 武州 寶城郡 代勞縣(보성군 회천면)의 백제 때 지명. 본서 권37 지리지에 나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따르면 都督府 직속의 歸化縣은 본래 麻斯良이라고 하였다. 다만 都督府로 추정되는 부여읍과 거리상으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같은 곳이 아닌 듯하다.
[역주:36권240] 회령현(會寧縣)
신라 武州 寶城郡 代勞縣(보성군 회천면)의 고려시대 지명. 代勞縣을 고려가 會寧縣으로 이름을 고쳐 長興府의 屬縣으로 삼았다. 현재의 寶城郡 會泉面 會寧里 일대에 해당한다.
[역주:36권241] 계수현(季水縣)
신라 武州 寶城郡(보성군 보성읍)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長興郡 長平面.
[역주:36권242] 계천현(季川縣)
신라 武州 寶城郡 季水縣(장흥군 장평면)의 백제 때 지명.
[역주:36권243] 장택현(長澤縣)
신라 武州 寶城郡 季水縣(장흥군 장평면)의 고려시대 지명. 季水縣을 고려가 長澤縣으로 이름을 고쳐 長興府의 屬縣으로 삼았으며, 長澤廢縣은 長興府 동북쪽 41리에 있었다.
[역주:36권244] 오아현(烏兒縣)
신라 武州 寶城郡(보성군 보성읍)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長興郡 大德邑.
[역주:36권245] 오차현(烏次縣)
신라 武州 寶城郡 烏兒縣(장흥군 대덕읍)의 백제 때 지명.
[역주:36권246] 정안현(定安縣)
신라 武州 寶城郡 烏兒縣(장흥군 대덕읍)의 고려시대 지명. 烏兒縣을 고려가 定安縣으로 이름을 고치고 靈巖郡의 屬縣으로 삼았다. 인종이 長興으로 이름을 고치고 府로 높였다. 원종이 懷州로 이름을 고치고 牧으로 높였다. 충선왕이 다시 長興府로 고쳤으며, 뒤에 왜구로 인하여 內地로 옮겼다. 조선 태조가 遂寧縣의 中寧山에 축성을 하고 治所로 삼았다. 태종이 都護府로 고치고 이듬 해에 치소를 遂寧縣의 古墟로 옮겼다. 고종이 郡으로 고쳤다. 《東國輿地勝覽》의 기록으로는 옛 定安縣의 위치를 알기 어려우나, 《大東輿地圖》의 표기에 따르면 옛 長興은 天冠山 남쪽의 大德邑에 해당한다.
[역주:36권247] 마읍현(馬邑縣)
신라 武州 寶城郡(보성군 보성읍)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長興郡 長興邑.
[역주:36권248] 고마미지현(古馬弥知縣)
신라 武州 寶城郡 馬邑縣(장흥군 장흥읍)의 백제 때 지명. 古馬弥知縣의 ‘弥’는 中宗壬申刊本에는 ‘𣃥’로 鑄字本에는 ‘旀’로 나오나 모두 弥의 訛字이므로 수정하였다. 본서 권37 지리지 百濟條에는 古馬彌知縣으로 나오고, 권10 신라본기 헌덕왕 17년(825)조에는 馬彌知縣이라고 하였다.
[역주:36권249] 수령현(遂寧縣)
신라 武州 寶城郡 馬邑縣(장흥군 장흥읍)의 고려시대 지명. 馬邑縣을 고려가 遂寧縣으로 이름을 고치고 靈巖郡의 屬縣으로 삼았다가, 뒤에 長興府에 내속시켰다. 조선이 府治를 遂寧으로 옮겼다.
[역주:36권250] 추성군(秋成郡)
신라 武州(광주광역시 동구)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潭陽郡 潭陽邑.
[역주:36권251] 추자혜군(秋子兮郡)
신라 武州 秋成郡(담양군 담양읍)의 백제 때 지명. 본서 권37 지리지에 나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따르면 秋子兮를 都督府 分嵯州 소속의 皐西縣으로 고치려 했던 적이 있었다.
[역주:36권252] 담양군(潭陽郡)
신라 武州 秋成郡(담양군 담양읍)의 고려시대 지명. 秋成郡을 고려 성종이 潭州都團練使로 삼았다가, 뒤에 潭陽郡으로 이름을 고쳐 羅州의 屬郡으로 삼았다. 明宗이 監務를 두었다. 조선 태조가 郡으로 고쳤다. 정종이 府로 높였고, 태종이 都護府로 높였다. 영조가 두 번이나 縣으로 낮추었다가 다시 府로 복구하였다. 고종이 郡으로 고쳤다.
[역주:36권253] 옥과현(玉菓縣)
신라 武州 秋成郡(담양군 담양읍)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谷城郡 玉果面. 고려 초에 寶城郡의 屬縣으로 삼았으며, 명종이 監務를 두었다. 조선이 縣監으로 고쳤다. 고종이 郡으로 고쳤다.
[역주:36권254] 과지현(菓支縣)
신라 武州 秋成郡 玉菓縣(곡성군 옥과면)의 백제 때 지명. 다른 기록에는 菓兮 또는 果支 또는 果兮라고도 나온다.
[역주:36권255] 율원현(栗原縣)
신라 武州 秋成郡(담양군 담양읍)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潭陽郡 金城面 原栗里 일대.
[역주:36권256] 율지현(栗支縣)
신라 武州 秋成郡 栗原縣(담양군 금성면)의 백제 때 지명.
[역주:36권257] 원율현(原栗縣)
신라 武州 秋成郡 栗原縣(담양군 금성면)의 고려시대 지명. 현재의 潭陽郡 金城面 原栗里 일대에 해당한다.
[역주:36권258] 영암군(靈巖郡)
신라 武州(광주광역시 동구)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靈岩郡 靈岩邑. 고려 성종이 朗州安南都護府로 고쳤고, 현종이 다시 낮추어 靈巖郡으로 삼았다.
[역주:36권259] 월나군(月奈郡)
신라 武州 靈巖郡(영암군 영암읍)의 백제 때 지명.
[역주:36권260] 반남군(潘南郡)
신라 武州(광주광역시 동구)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羅州市 潘南面. 고려 초에 縣으로 낮추어 羅州牧의 屬縣으로 삼았다.
[역주:36권261] 반나부리현(半奈夫里縣)
신라 武州 潘南郡(나주시 반남면)의 백제 때 지명. 본서 권37 지리지에 나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따르면 半奈夫里를 都督府 帶方州(나주시 다시면) 소속의 半那縣으로 고치려 했던 적이 있었다.
[역주:36권262] 야로현(野老縣)
신라 武州 潘南郡(나주시 반남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靈巖郡 金井面 安老里 일대.
[역주:36권263] 아로곡현(阿老谷縣)
신라 武州 潘南郡 野老縣(영암군 금정면)의 백제 때 지명. 본서 권37 지리지에 나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따르면 阿老谷은 東明州(공주시) 鹵辛縣의 본명과 이름이 같다. 다만 공주시와 거리상으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같은 곳인지 의문이 간다.
[역주:36권264] 안로현(安老縣)
신라 武州 潘南郡 野老縣(영암군 금정면)의 고려시대 지명. 野老縣을 고려가 安老縣으로 이름을 고쳐 羅州牧의 屬縣으로 삼았다. 현재의 영암군 금정면 安老里 일대에 해당한다.
[역주:36권265] 곤미현(昆湄縣)
신라 武州 潘南郡(나주시 반남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靈巖郡 鶴山面. 다만 본서에서 昆湄縣을 潘南郡의 領縣이라고 한 것과 달리, 《高麗史》 地理志나 《東國輿地勝覽》에서는 이를 靈巖郡의 領縣이라고 하였다. 고려가 靈巖郡의 屬縣으로 삼았다. 조선도 그대로 두었으며, 昆湄廢縣은 靈巖郡 서쪽 30리에 있었다. 이 곳의 현재 위치를 영암군 美岩面에 비정한 견해가 있으니(李丙燾, 《國譯 三國史記》), 지명 발음상의 유사성이 느껴지는 장점이 있으나, 里數를 따져 보고 《大東輿地圖》의 지형과 비교해 볼 때 중심지는 그 옆의 鶴山面이 더욱 타당한 것이 아닐까 한다.
[역주:36권266] 고미현(古彌縣)
신라 武州 潘南郡 昆湄縣(영암군 학산면)의 백제 때 지명. 다른 기록에는 枯彌縣이라고도 하였다.
[역주:36권267] 갑성군(岬城郡)
신라 武州(광주광역시 동구)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長城郡 北一面.
[역주:36권268] 고시이현(古尸伊縣)
신라 武州 岬城郡(장성군 북일면)의 백제 때 지명.
[역주:36권269] 장성군(長城郡)
신라 武州 岬城郡(장성군 북일면)의 고려시대 지명. 岬城郡을 고려가 長城郡으로 이름을 고쳐 靈光郡의 屬郡으로 삼았고, 명종이 監務를 두었다. 조선이 縣監으로 고쳤다. 선조가 長城과 珍原을 합쳐서 한 邑으로 만들고 聖子山 아래(장성군 장성읍)로 치소를 옮겼으니, 옛 長城은 새로운 치소 북쪽 20리에 있었다. 효종이 府로 높였고, 고종이 郡으로 고쳤다. 里數로 따져 보아, 조선 중기 이전의 長城郡의 위치는 현재의 장성군 北一面에 해당한다.
[역주:36권270] 진원현(珍原縣)
신라 武州 岬城郡(장성군 북일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長城郡 珍原面 珍原里 일대. 고려가 羅州의 屬縣으로 삼았고, 명종이 監務를 두었다. 조선이 縣監으로 고쳤다. 선조가 長城에 합쳐 넣었으니, 珍原廢縣은 長城郡治(장성읍) 남쪽 20리에 있었다.
[역주:36권271] 구사진혜현(丘斯珍兮縣)
신라 武州 岬城郡 珍原縣(장성군 진원면)의 백제 때 지명. 본서 권37 지리지에 나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따르면 仇斯珍兮를 都督府 分嵯州 소속의 貴旦縣으로 고치려 한 적이 있었으니, 仇斯珍兮는 丘斯珍兮의 異稱인 듯하다. 또한 《周書》 권49 百濟傳에 나오는 5방성 중의 하나인 南方 久知下城도 이 곳에 비정된다.
[역주:36권272] 삼계현(森溪縣)
신라 武州 岬城郡(장성군 북일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長城郡 森溪面. 고려가 靈光郡의 屬縣으로 삼았다. 조선 중종이 社倉을 설치하였다. 현재의 長城郡 森溪面 面所인 社倉里 일대에 해당한다.
[역주:36권273] 소비혜현(所非兮縣)
신라 武州 岬城郡 森溪縣(장성군 삼계면)의 백제 때 지명. 다른 기록에는 所乙夫라고도 나온다.
[역주:36권274] 무령군(武靈郡)
신라 武州(광주광역시 동구)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靈光郡 靈光邑.
[역주:36권275] 무시이군(武尸伊郡)
신라 武州 武靈郡(영광군 영광읍)의 백제 때 지명. 본서 권37 지리지에 나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따르면 号尸伊城 또는 号尸伊村을 沙泮州 州治인 牟支縣으로 고치려 했던 적이 있었다. 여기서 号尸伊村의 ‘号’는 中宗壬申刊本 《三國史記》에는 號의 略字처럼 쓰여져 있고, 鑄字本에는 아예 ‘號’로 되어 있다. 그러나 뒤에 漢式으로 고친 이름을 보아 이는 ‘무’의 音을 가진 字인 듯하니, ‘武’의 古略字인 ‘另(무)’를 잘못 판각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역주:36권276] 영광군(靈光郡)
신라 武州 武靈郡(영광군 영광읍)의 고려시대 지명. 武靈郡을 고려가 靈光郡으로 이름을 고쳤다. 조선 인조가 縣으로 낮추었다가 뒤에 郡으로 복구하였다. 영조가 縣으로 낮추었다가 뒤에 복구하였다. 고종이 郡으로 고쳤다.
[역주:36권277] 장사현(長沙縣)
신라 武州 武靈郡(영광군 영광읍)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高敞郡 上下面 下長里(面所). 고려가 그대로 두었다가 뒤에 監務를 두고 茂松縣(고창군 성송면)을 겸임케 하였다. 조선 태종이 茂松과 합쳐서 茂長縣으로 이름을 고치고 鎭을 두어 兵馬使로 하여금 縣事를 겸임케 하였다. 세종이 兵馬使를 고쳐서 僉節制使로 삼았다가 뒤에 縣監으로 고쳤으며, 옛 長沙는 茂長縣 북쪽 20리에 있었고, 石城 터가 있다. 고종이 郡으로 고쳤다. 현재 고창군 상하면 將軍山城 아래 下長里(面所) 일대에 해당한다.
[역주:36권278] 상로현(上老縣)
신라 武州 武靈郡 長沙縣(고창군 상하면)의 백제 때 지명. 본서 권37 지리지에 나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따르면 上老를 都督府 沙泮州(영광군 영광읍) 소속의 佐魯縣으로 고치려 한 적이 있었다.
[역주:36권279] 고창현(高敞縣)
신라 武州 武靈郡(영광군 영광읍)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高敞郡 高敞邑. 고려가 古阜郡의 屬縣으로 삼았다가 뒤에 尙質監務가 와서 겸임토록 하였다. 조선 태종이 두 縣에 각기 監務를 두고 뒤에 縣監으로 고쳤다. 고종이 郡으로 고쳤다.
[역주:36권280] 모량부리현(毛良夫里縣)
신라 武州 武靈郡 高敞縣(고창군 고창읍)의 백제 때 지명. 본서 권37 지리지에 나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따르면 毛良夫里를 都督府 沙泮州(영광군 영광읍) 소속의 無割縣으로 고치려 한 적이 있었다.
[역주:36권281] 무송현(茂松縣)
신라 武州 武靈郡(영광군 영광읍)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北道 高敞郡 星松面 茂松里 일대. 고려가 그대로 두었다. 조선 태종이 長沙(고창군 상하면)와 합쳐서 茂長縣으로 이름을 고치고 鎭을 두어 兵馬使로 하여금 縣事를 겸임케 하였다. 세종이 兵馬使를 고쳐서 僉節制使로 삼았다가 뒤에 縣監으로 고쳤으며, 옛 茂松은 茂長縣 남쪽 20리에 있었다.
[역주:36권282] 송미지현(松彌知縣)
신라 武州 武靈郡 茂松縣(고창군 성송면)의 백제 때 지명.
[역주:36권283] 승평군(昇平郡)
신라 武州(광주광역시 동구)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順天市.
[역주:36권284] 감평군(欿平郡)
신라 武州 昇平郡(순천시)의 백제 때 지명. 다른 기록에는 武平 또는 沙平이라고도 나온다.
[역주:36권285] 승주(昇州)
신라 武州 昇平郡(순천시)의 고려시대 지명. 昇平郡을 고려 성종이 昇州兗海軍節度使로 삼았고, 정종이 다시 昇平郡으로 고쳤다. 충선왕이 높여서 昇州牧으로 고쳤다가 順天府로 이름을 고쳐 낮추었다. 조선 태종이 都護府로 고쳤다. 효종이 縣으로 낮추었다가 얼마 뒤에 府로 복구하였다. 정조가 縣으로 낮추었다가 이듬 해에 다시 높였다. 고종이 郡으로 고쳤다.
[역주:36권286] 해읍현(海邑縣)
신라 武州 昇平郡(순천시)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麗水市.
[역주:36권287] 원촌현(猿村縣)
신라 武州 昇平郡 海邑縣(여수시)의 백제 때 지명.
[역주:36권288] 여수현(麗水縣)
신라 武州 昇平郡 海邑縣(여수시)의 고려시대 지명. 海邑縣을 고려가 麗水縣으로 이름을 고쳤고, 충정왕이 縣令을 두었다. 조선 태조가 다시 順天府에 속하게 하였으며, 麗水廢縣은 順天府 동쪽 60리에 있었다. 고종이 郡을 설치하였다.
[역주:36권289] 희양현(晞陽縣)
신라 武州 昇平郡(순천시)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光陽市 光陽邑.
[역주:36권290] 마로현(馬老縣)
신라 武州 昇平郡 晞陽縣(광양시 광양읍)의 백제 때 지명.
[역주:36권291] 광양현(光陽縣)
신라 武州 昇平郡 晞陽縣(광양시 광양읍)의 고려시대 지명. 晞陽縣을 고려가 光陽縣으로 이름을 고쳐 그대로 順天府의 屬縣으로 삼았다가, 뒤에 監務를 두었다. 조선 태종이 縣監으로 고쳤다. 선조가 順天에 넣었다가 얼마 뒤에 복구하여 縣으로 삼았다. 고종이 郡으로 고쳤다.
[역주:36권292] 여산현(廬山縣)
신라 武州 昇平郡(순천시)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麗川郡 突山邑. 고려가 옛날 이름인 突山縣을 회복하여 그대로 昇平郡의 屬縣으로 삼았다. 조선 성종이 鎭을 설치하였다가 뒤에 폐지하였다. 고종이 郡으로 고쳤다.
[역주:36권293] 돌산현(突山縣)
신라 武州 昇平郡 廬山縣(여천군 돌산읍)의 백제 때 지명. 다른 기록에는 突山鄕이라고도 나오니, 본서 권12 신라본기 경애왕 4년(927) 4월조에 康州所管의 突山等 四鄕이 고려 太祖에게 귀부하였다고 하였다.
[역주:36권294] 곡성군(谷城郡)
신라 武州(광주광역시 동구)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谷城郡 谷城邑. 고려 초에 羅州의 屬郡으로 삼았고, 명종이 監務를 두었다. 조선이 縣監으로 고쳤다. 선조가 南原에 넣었고, 광해군이 다시 縣을 설치하였다. 고종이 郡으로 고쳤다.
[역주:36권295] 욕내군(欲乃郡)
신라 武州 谷城郡(곡성군 곡성읍)의 백제 때 지명.
[역주:36권296] 부유현(富有縣)
신라 武州 谷城郡(곡성군 곡성읍)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順天市 住岩面. 고려 초에 順天府의 屬縣으로 삼았으며, 富有廢縣은 順天府 북쪽 60리에 있었다. 《大東輿地圖》와 비교해 볼 때, 현재의 순천시 주암면 일대에 해당한다.
[역주:36권297] 둔지현(遁支縣)
신라 武州 谷城郡 富有縣(순천시 주암면)의 백제 때 지명.
[역주:36권298] 구례현(求禮縣)
신라 武州 谷城郡(곡성군 곡성읍)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求禮郡 求禮邑. 고려 초에 南原府의 屬縣으로 삼았고, 인종이 監務를 두었다. 조선 태종이 縣監으로 고쳤다. 燕山君이 폐지하여 部曲으로 삼아 南原에 속하게 하였다. 중종이 다시 縣으로 삼았다. 고종이 郡으로 고쳤다.
[역주:36권299] 구차례현(仇次禮縣)
신라 武州 谷城郡 求禮縣(구례군 구례읍)의 백제 때 지명.
[역주:36권300] 동복현(同福縣)
신라 武州 谷城郡(곡성군 곡성읍)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和順郡 同福面. 고려 초에 寶城郡의 屬縣으로 삼았고, 뒤에 높여서 監務로 삼았다. 조선 태조가 和順監務를 겸하게 하였다. 태종이 和順에 합쳐서 福順이라고 개칭하였다가, 뒤에 각기 복구하여 縣監으로 삼았다. 효종이 和順에 넣었고, 현종이 복구하였다. 고종이 郡으로 고쳤다.
[역주:36권301] 두부지현(豆夫只縣)
신라 武州 谷城郡 同福縣(화순군 동복면)의 백제 때 지명.
[역주:36권302] 능성군(陵城郡)
신라 武州(광주광역시 동구)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和順郡 綾州面. 고려 초에 羅州의 屬郡으로 삼았고, 인종이 縣令을 두었다. 조선 태종이 和順縣을 합쳐서 順成縣으로 고쳤다가 뒤에 각기 복구하였다. 인조가 綾州로 이름을 고치면서 州로 높였다. 고종이 郡으로 고쳤다.
[역주:36권303] 이릉부리군(尒陵夫里郡)
신라 武州 陵城郡(화순군 능주면)의 백제 때 지명. 다른 기록에는 竹樹夫里 또는 仁夫里라고도 나온다.
[역주:36권304] 부리현(富里縣)
신라 武州 陵城郡(화순군 능주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寶城郡 福內面.
[역주:36권305] 파부리군(波夫里郡)
신라 武州 陵城郡 富里縣(보성군 복내면)의 백제 때 지명.
[역주:36권306] 복성현(福城縣)
신라 武州 陵城郡 富里縣(보성군 복내면)의 고려시대 지명. 富利縣을 고려가 福城縣으로 이름을 고쳐서 寶城郡의 屬縣으로 삼았으며, 福城廢縣은 寶城郡 북쪽 30리에 있었다.
[역주:36권307] 여미현(汝湄縣)
신라 武州 陵城郡(화순군 능주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和順郡 和順邑.
[역주:36권308] 잉리아현(仍利阿縣)
신라 武州 陵城郡 汝湄縣(화순군 화순읍)의 백제 때 지명. 다른 기록에는 汝濱 또는 海濱이라고도 나온다.
[역주:36권309] 화순현(和順縣)
신라 武州 陵城郡 汝湄縣(화순군 화순읍)의 고려시대 지명. 汝湄縣을 고려가 和順縣으로 이름을 고쳐 羅州의 屬縣으로 삼았다가 뒤에 도로 綾城縣(화순군 능주면)에 속하게 하였다. 공양왕이 監務를 두고 南平縣(나주시 남평면)을 겸임케 하였다. 조선 태조가 두 縣으로 나누고 同福(화순군 동복면)監務가 와서 겸임케 하였다. 태종이 同福을 폐지하고 本縣에 합쳐 넣어 和順監務라고 칭하였다가 福順으로 개칭하였으며, 뒤에 다시 同福을 떼어내고 本縣을 綾城에 합쳐넣어 順成이라고 하였다가, 얼마 뒤 예전처럼 복구하여 縣監으로 삼았다. 선조가 綾城에 넣었고, 광해군이 다시 縣을 설치하였다. 고종이 郡으로 고쳤다.
[역주:36권310] 금산군(錦山郡)
신라 武州(광주광역시 동구)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羅州市. 다른 기록에는 錦城이라고도 나온다.
[역주:36권311] 발라군(發羅郡)
신라 武州 錦山郡(나주시)의 백제 때 지명. 다른 기록에는 通義라고도 나온다. 본서 권37 지리지에 나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따르면 巴老彌를 都督府 帶方州(나주시 다시면) 소속의 布賢縣으로 고치려 한 적이 있었으니, 巴老彌는 發羅의 異稱인 듯하다. 본서 권44 黑齒常之傳에 의하면, 그는 백제 西部 출신의 達率로서 風達郡將을 겸하였다고 하니, 그 풍달군도 발라군의 다른 호칭인 듯하다. 본서 권8 신라본기 신문왕 6년(686) 2월조에 發羅州를 郡으로 삼고 대신 武珍郡을 州로 삼았다고 하였다. 그 앞의 發羅州의 설치 시기는 분명치 않으나, 나당전쟁 중 신라가 百濟故地를 완전히 장악한 문무왕 12년(672) 전후한 시기가 아닐까 한다.
[역주:36권312] 나주목(羅州牧)
신라 武州 錦山郡(나주시)의 고려시대 지명. 錦山郡을 신라 말에 甄萱이 자기의 소유로 삼으려고 하였는데, 弓裔가 王建에게 명하여 쳐서 빼앗고 羅州로 이름을 고쳤다. 고려 성종이 節度使를 두고 鎭海軍이라고 칭하였다. 현종이 契丹軍을 피해 와서 머무르다가 還都한 바 있고, 뒤에 牧으로 높였다. 조선 인조가 錦城縣으로 낮추었다가 다시 州로 높였다. 영조가 縣으로 낮추었다가 복구하였다. 고종이 郡으로 고쳤다.
[역주:36권313] 회진현(會津縣)
신라 武州 錦山郡(나주시)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羅州市 多侍面. 고려 초에 그대로 羅州牧의 屬縣으로 삼았으며, 會津廢縣은 羅州 서쪽 15리에 있었다. 里數로 따져 보아, 현재의 羅州邑 서쪽 多侍面에 해당한다.
[역주:36권314] 두힐현(豆肹縣)
신라 武州 錦山郡 會津縣(나주시 다시면)의 백제 때 지명. 본서 권37 지리지에 나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따르면, 이 곳 豆肹 또는 竹軍城을 帶方州 州治인 竹軍縣으로 고치려 했던 적이 있었다. 한편 신라 武州 分嶺郡 薑原縣(고흥군 두원면)의 백제 때 지명도 豆肹縣이어서, 백제 豆肹縣은 두 곳이 있었다.
[역주:36권315] 철야현(鐵冶縣)
신라 武州 錦山郡(나주시)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羅州市 鳳凰面 鐵川里 일대. 고려도 그대로 두었다가, 뒤에 綾城縣의 屬縣으로 삼았다. 조선 태종이 南平縣(나주시 남평면)에 속하게 하였으며, 鐵冶廢縣은 南平縣 남쪽 30리에 있었다.
[역주:36권316] 실어산현(實於山縣)
신라 武州 錦山郡 鐵冶縣(나주시 봉황면)의 백제 때 지명.
[역주:36권317] 여황현(艅艎縣)
신라 武州 錦山郡(나주시)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光州廣域市 光山區 雲水洞 일대. 고려 초에 그대로 羅州牧의 屬縣으로 삼았으며, 艅艎廢縣은 羅州 북쪽 40리에 있었다. 《大東輿地圖》와 비교할 때, 현재의 光州廣域市 光山區 서쪽 魚登山 기슭의 雲水洞 일대에 해당한다.
[역주:36권318] 수천현(水川縣)
신라 武州 錦山郡 艅艎縣(광주광역시 광산구 운수동)의 백제 때 지명. 다른 기록에는 水入伊라고도 나온다.
[역주:36권319] 양무군(陽武郡)
신라 武州(광주광역시 동구)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康津郡 兵營面.
[역주:36권320] 도무군(道武郡)
신라 武州 陽武郡(강진군 병영면)의 백제 때 지명.
[역주:36권321] 도강군(道康郡)
신라 武州 陽武郡(강진군 병영면)의 고려시대 지명. 陽武郡을 고려가 道康郡으로 이름을 고쳐서 靈巖郡의 屬郡으로 삼았고, 명종이 監務를 두었다. 조선 태종이 兵馬節度使營을 道康縣의 옛 치소로 옮기면서 이를 耽津縣과 합쳐서 康津縣으로 이름을 고치고 耽津을 치소로 삼았다. 세종이 道康의 松溪로 옮겼고, 성종이 도로 耽津의 옛 치소로 옮겼으며, 道康廢縣은 康津 북쪽 27리에 있었다.
[역주:36권322] 고안현(固安縣)
신라 武州 陽武郡(강진군 병영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海南郡 馬山面. 다른 기록에는 同安縣이라고도 나온다.
[역주:36권323] 고서이현(古西伊縣)
신라 武州 陽武郡 固安縣(해남군 마산면)의 백제 때 지명.
[역주:36권324] 죽산현(竹山縣)
신라 武州 陽武郡 固安縣(해남군 마산면)의 고려시대 지명. 固安縣을 고려가 竹山縣으로 이름을 고쳐 靈巖郡의 屬縣으로 삼았다. 조선이 海南縣에 속하게 하였으며, 竹山廢縣은 海南縣 북쪽 10리에 있었다.
[역주:36권325] 탐진현(耽津縣)
신라 武州 陽武郡(강진군 병영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康津郡 康津邑. 고려가 靈巖郡의 屬縣으로 삼았다가 뒤에 長興府에 속하게 하였다. 조선 태종이 兵馬節度使營을 道康縣의 옛 치소로 옮기면서 이를 耽津縣에 합쳐서 康津縣으로 이름을 고치고 耽津을 치소로 삼았다. 세종이 道康의 松溪로 옮겼으며, 성종이 도로 耽津의 옛 치소로 옮겼다. 고종이 郡으로 고쳤다.
[역주:36권326] 동음현(冬音縣)
신라 武州 陽武郡 耽津縣(강진군 강진읍)의 백제 때 지명.
[역주:36권327] 침명현(浸溟縣)
신라 武州 陽武郡(강진군 병영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海南郡 縣山面 古縣里 일대. 다른 기록에는 投濱이라고도 나온다.
[역주:36권328] 새금현(塞琴縣)
신라 武州 陽武郡 浸溟縣(해남군 현산면)의 백제 때 지명. 다른 기록에는 投濱이라고도 나온다.
[역주:36권329] 해남현(海南縣)
신라 武州 陽武郡 浸溟縣(해남군 현산면)의 고려시대 지명. 浸溟縣을 고려가 海南縣으로 이름을 고쳐서 靈巖郡의 屬縣으로 삼았다. 조선 태종이 珍島縣에 합쳐서 海珍縣으로 이름을 고치고 邑治를 靈巖 屬縣 玉山(해남군 삼산면) 지역(해남읍)으로 옮겼고, 세종이 다시 나누어 縣監으로 삼았으며, 옛 海南은 頭輪山 남쪽 해안가에 있었다. 고종이 郡으로 고쳤다. 고려의 海南縣은 현재 頭輪山 서남쪽의 縣山面 古縣里에 해당한다.
[역주:36권330] 황원현(黃原縣)
신라 武州 陽武郡(강진군 병영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海南郡 黃山面. 고려가 靈巖郡의 屬郡으로 삼았고, 뒤에 海南縣에 속하게 하였으며, 黃原廢縣은 縣 서쪽 15리에 있었다.
[역주:36권331] 황술현(黃述縣)
신라 武州 陽武郡 黃原縣(해남군 황산면)의 백제 때 지명.
[역주:36권332] 무안군(務安郡)
신라 武州(광주광역시 동구)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務安郡 務安邑. 務安郡을 고려 혜종이 勿良郡으로 이름을 고쳤다. 성종이 다시 務安郡으로 복구하고 羅州의 屬郡으로 삼았다. 명종이 監務를 두었고, 공양왕이 城山·極浦 防禦使를 겸하게 하였다. 조선이 縣監으로 고쳤다. 고종이 郡으로 고쳤다가 뒤에 府로 높였으며, 光武때 다시 郡으로 고쳤다.
[역주:36권333] 물아혜군(勿阿兮郡)
신라 武州 務安郡(무안군 무안읍)의 백제 때 지명.
[역주:36권334] 함풍현(咸豊縣)
신라 武州 務安郡(무안군 무안읍)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咸平郡 咸平邑. 고려가 靈光郡의 屬縣으로 삼았다. 명종이 監務를 두었다. 조선 태종이 牟平縣과 합쳐서 咸平縣으로 이름을 고쳤다. 고종이 郡으로 고쳤다.
[역주:36권335] 굴내현(屈乃縣)
신라 武州 務安郡 咸豊縣(함평군 함평읍)의 백제 때 지명. 본서 권37 지리지에 나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따르면 屈奈를 都督府 帶方州(나주시 다시면) 소속의 軍那縣으로 고치려 했던 적이 있었으니, 屈奈는 屈乃의 異稱인 듯하다.
[역주:36권336] 다기현(多岐縣)
신라 武州 務安郡(무안군 무안읍)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羅州市 文平面.
[역주:36권337] 다지현(多只縣)
신라 武州 務安郡 多岐縣(나주시 문평면)의 백제 때 지명. 본서 권37 지리지에 나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따르면 沙泮州 多支縣이 있고 그 본명이 夫只였다고 되어 있는데, 같은 곳인지는 분명치 않다.
[역주:36권338] 모평현(牟平縣)
신라 武州 務安郡 多岐縣(나주시 문평면)의 고려시대 지명. 多岐縣을 고려가 牟平縣으로 이름을 고쳐서 靈光郡의 屬縣으로 삼았다. 조선 태종이 咸豊과 합쳐서 咸平縣으로 이름을 고치고 縣治를 咸豊에 두었으며, 옛 牟平은 縣 동쪽 30리에 있었다.
[역주:36권339] 해제현(海際縣)
신라 武州 務安郡(무안군 무안읍)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務安郡 海際面. 고려가 靈光郡의 屬縣으로 삼았다. 조선 태조가 咸豊縣(함평군 함평읍)에 속하게 하였다
[역주:36권340] 도제현(道際縣)
신라 武州 務安郡 海際縣(무안군 해제면)의 백제 때 지명. 다른 기록에는 陰海 또는 大峯이라고도 나온다.
[역주:36권341] 진도현(珍島縣)
신라 武州 務安郡(무안군 무안읍)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珍島郡 古郡面. 고려가 羅州의 屬縣으로 삼았다가, 뒤에 縣令을 두었다. 충정왕이 倭寇로 인하여 內地인 昆湄縣(영암군 학산면)으로 옮겼다. 조선 태종이 海南縣에 합쳐서 海珍郡으로 삼았다. 세종이 다시 나누어 각기 복구하였다. 옛 珍島城은 今治 동북쪽 15리에 있었다는 《東國輿地勝覽》 珍島郡條의 기록으로 보아, 조선 이후의 珍島縣은 현재의 珍島邑에 있었고, 고려 이전의 珍島縣은 현재의 珍島郡 古郡面에 해당한다.
[역주:36권342] 인진도군(因珍島郡)
신라 武州 務安郡 珍島縣(진도군 고군면)의 백제 때 지명.
[역주:36권343] 뇌산군(牢山郡)
신라 武州(광주광역시 동구)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珍島郡 郡內面.
[역주:36권344] 도산현(徒山縣)
신라 武州 牢山郡(진도군 군내면)의 백제 때 지명. 다른 기록에는 猿山이라고도 나온다. 본서 권37 지리지에 나오는 당나라의 都督府 설치 계획서에 따르면, 帶方州(나주시 다시면) 徒山縣이 있고 그 본명이 抽山이었다고 한다.
[역주:36권345] 가흥현(嘉興縣)
신라 武州 牢山郡(진도군 군내면)의 고려시대 지명. 牢山郡을 고려가 嘉興縣으로 이름을 고쳐서 珍島縣의 屬縣으로 삼았다. 《東國輿地勝覽》에서 嘉興廢縣은 珍島郡 북쪽 10리에 있었다고 하였으니, 현재의 珍島郡 郡內面에 해당한다.
[역주:36권346] 첨탐현(瞻耽縣)
신라 武州 牢山郡(진도군 군내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珍島郡 臨淮面.
[역주:36권347] 매구리현(買仇里縣)
신라 武州 牢山郡 瞻耽縣(진도군 임회면)의 백제 때 지명.
[역주:36권348] 임회현(臨淮縣)
신라 武州 牢山郡 瞻耽縣(진도군 임회면)의 고려시대 지명. 瞻耽縣을 고려가 臨淮縣으로 이름을 고쳐 珍島縣의 屬縣으로 삼았다.
[역주:36권349] 압해군(壓海郡)
신라 武州(광주광역시 동구)에 속한 郡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新安郡 押海面 押海島. 다른 기록에는 押海라고도 나온다. 고려 초에 羅州의 屬郡으로 삼았다. 뒤에 靈光郡에 속하게 하였다가 다시 羅州에 내속시켰다. 본래 바다 안의 섬이었는데 왜구로 인하여 내륙으로 옮겨 그대로 縣으로 삼았으며, 壓海廢縣은 羅州 남쪽 40리에 있었다. 《東國輿地勝覽》에 기록된 조선 초기 廢縣의 위치는 대략 羅州市 潘南面·新北面 일대에 해당하나, 고려 후기에 옮기기 이전의 壓海郡 위치는 현재의 목포시 서쪽에 인접한 押海島에 해당한다.
[역주:36권350] 아차산현(阿次山縣)
신라 武州 壓海郡(신안군 압해면)의 백제 때 지명. 본서 권37 지리지 百濟條에서는 阿次山郡이라고 되어 있다.
[역주:36권351] 갈도현(碣島縣)
신라 武州 壓海郡(신안군 압해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靈光郡 郡南面 南昌里 일대.
[역주:36권352] 아로현(阿老縣)
신라 武州 壓海郡 碣島縣(영광군 군남면)의 백제 때 지명. 다른 기록에는 何老 또는 谷野 또는 葛草縣 또는 加位라고도 나온다.
[역주:36권353] 육창현(六昌縣)
신라 武州 壓海郡 碣島縣(영광군 군남면)의 고려시대 지명. 碣島縣을 고려가 六昌縣(또는 陸昌縣)으로 이름을 고쳐 靈光郡의 屬縣으로 삼았으며, 陸昌鄕은 靈光郡 남쪽 25리에 있었다. 《大東輿地圖》와 비교해 볼 때, 현재의 靈光郡 郡南面 南昌里 일대에 해당한다.
[역주:36권354] 염해현(鹽海縣)
신라 武州 壓海郡(신안군 압해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靈光郡 白岫邑 芝山里 및 鹽山面 일대.
[역주:36권355] 고록지현(古祿只縣)
신라 武州 壓海郡 鹽海縣(영광군 백수읍)의 백제 때 지명. 다른 기록에는 開要라고도 나온다.
[역주:36권356] 임치현(臨淄縣)
신라 武州 壓海郡 鹽海縣(영광군 백수읍)의 고려시대 지명. 鹽海縣을 고려가 臨淄縣으로 이름을 고치고 靈光郡의 屬縣으로 삼았으며, 臨淄廢縣은 郡 서쪽 26리에 있었다. 서남쪽 30리 지점인 鹽山面이 지명의 유사성이 있으나, 《大東輿地圖》의 표기에 따라 그 중심지를 靈光郡 白岫面 芝山里 일대에 비정해 둔다.
[역주:36권357] 안파현(安波縣)
신라 武州 壓海郡(신안군 압해면)의 領縣의 하나로서, 현재의 全羅南道 新安郡 長山面 長山島.
[역주:36권358] 거지산현(居知山縣)
신라 武州 壓海郡 安波縣(신안군 장산면)의 백제 때 지명. 다른 기록에는 屈知山縣 또는 安陵이라고도 나온다.
[역주:36권359] 장산현(長山縣)
신라 武州 壓海郡 安波縣(신안군 장산면)의 고려시대 지명. 安波縣을 고려가 長山縣으로 이름을 고쳐 羅州牧의 屬縣으로 삼았다. 본래는 섬이었는데, 뒤에 倭寇로 인하여 터전을 잃고 내륙으로 옮겼으며, 長山廢縣은 羅州 남쪽 20리에 있었다. 《東國輿地勝覽》에 기록된 조선 초기 廢縣의 위치는 대략 羅州市 細枝面 일대에 해당하나, 고려 이전 長山縣 및 安波縣의 위치는 현재의 新安郡 長山面 長山島였다.